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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기억해줘, 지금 떠나가지만

1.

며칠 전. 나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잠깐 나갔다 올게요"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쿵쿵 뛰고 손이 덜덜 떨렸다. 올 게 왔다고 생각했다. 이 집에서 20년을 살면서 찌그러진 내면이 이제 몸에까지 나타나기 시작했구나. 내가 사는 집에서도 불안함을 버릴 수 없다면, 내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진짜 나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해질 수 있는 나의 공간. 이 집 말고, 기숙사 말고, A의 자취방도 말고... 어딜 가야 완벽하게 편안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디에도 없는 나의 집.


2.

디즈니와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에 관심이 생긴 것은 순전히 주인공 소년 미겔이 내가 사랑하는 이주승 배우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주제에 남자친구까지 끌고 보러 갔으니 뻔뻔하기도 하지. 코코는 좋은 작품이었고 영상과 음악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웠다. 애니메이션은 재미 없어서 잘 보지 않는다는 남자친구는 줄줄 울었다. 나는 울 수가 없었다. 미겔, 너의 가족들은 참 다정하고 상냥하구나. 네게는 돌아갈 집이 있구나.


3.

내 구질구질한 가정사 때문에 멀쩡히 잘 만든 작품을 흉볼 생각은 없다. 번쩍이는 공중도시랑 멕시코 음악이랑 볼이 통통한 남자아이가 나오는데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어... 흥겹고 아름다운 장면이 많은 영화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명장면으로 꼽는 부분은 역시 엑또르가 떠나기 전 딸 코코에게 명곡 'remember me'를 불러 주는 장면이다. 명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심화전공이 영어면서...) 한국어 더빙판의 가사를 가져왔다.

기억해 줘, 지금 떠나가지만
기억해 줘, 제발 혼자 울지마
몸은 저 멀리 있어도 내 맘은 네 곁에
매일 밤마다 와서 조용히 노래해줄게


4.

엑또르가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들려줄 때 코코는 불과 세 살. 가왕의 꿈을 안고 떠난 아빠는 뭘 해보지도 못하고 친구에게 살해당하고, 코코는 평생을 아빠도 음악도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9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이제 이름도 헷갈리는 증손자가 기타를 메고 와서 이 곡을 다시 연주할 때 코코는 노래를 완벽하게 따라 부른다.

아아 위대한 가족의 힘! 또는 음악의 힘! 또는 자꾸 옛날 기억만 생생해지는 알츠하이머의 힘!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난 그저 '마음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사랑보다 작고, 관심이나 애정보다도 작은 한 톨의 마음을 서로를 위해 쓰는 것.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의 사진을 방에 두고 일 년에 단 하루라도 기억을 떠올리는 것. 그 작은 행동이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까마득히 오래 전 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게도 한다는 것. 그 작고 큰 힘.


5.

훌쩍이며 영화관을 나와서, 인터넷에 코코를 검색해보고 remember me의 한국 버전을 윤종신이 불렀다는 tmi를 굳이 알려주던 남자친구는 지금 여기 없다. 결국 나의 한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통보...했다면 글이 좀 더 우울해졌겠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고,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공군 785기. 머리를 빡빡 밀어 못생긴 왕감자 같은 모습으로 웃으면서 손 흔들며 떠났다. 입소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늘 그랬듯 남자친구한테 전화를 걸려고 했다. 야, 나 오늘 진주 갔다. 공군훈련소 처음 봐서 짱 신기했다. 제복 입은 사람들이 막 총을 휙휙 돌렸어. 이런 말을 해야 되는데, 아. 네가 없구나.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피곤하다고 전화하면 기숙사까지 와서 안아주던 너는 이제 없구나. 넌 내가 안겨 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내 집이었는데.


6.

남자친구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우리 신문에 실을 '독자의 시선'을 써주는 일이었다. 아무도 독자의 시선을 쓰지 않아 소통면에 구멍이 나게 생겼다고 내가 부탁했는데, 정작 나도 발행하느라 바빠서 남자친구가 떠난 후에야 읽어보게 됐다. 제목은 '<코코>의 메시지에 대한 현대‧사회적 해석'. 딱 남자친구다운 글이었다. 재미없고 진지하고 자꾸 뭘 분석하려고 하고. 거칠게 요약하면 '가족 간에라도 무조건적 사랑은 존재하기 어려우니 부모는 자식 인생에 간섭이나 그만해라'라는 내용이었다.

남자친구가 이렇게까지 당돌한 주장을 편 건 전적으로 나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남자친구의 가정은 영화 속 미겔네 집보다 따뜻했으므로. 입대가 가까워지자 남자친구의 엄마가 인형 두 개(내가 예전에 남자친구한테 사준)에 각각 걔 이름과 내 이름을 붙여서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는 얘기는 너무 웃기고 슬프고 귀여워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내게 직접 보여줬다. 동물인형 두 개가 껴안고 있는 사진. 얘가 우리 아들이고 얘는 지연이 너야. 내가 이런 엄마 밑에서 자랐으면 <코코>를 현대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해석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치만 남자친구는 그런 글을 썼다. 다 싫고 미운데 미워할 수 없는 게 엿같고 집에만 있으면 소화가 안 되고 빨리 도망 안 치면 내 인생에 희망은 없을 것 같다고 내가 징징거리는 걸 들었기 때문에.


7.

기억해 줘, 지금 떠나가지만, 기억해 줘, 제발 혼자 울지마. 몸은 저 멀리 있어도 내 맘은 네 곁에, 매일 밤마다 와서 조용히 노래해줄게. 나는 이제 남자친구 없이 2년을 살아야 한다. 막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다. 일주일이 지났고 이제는 울지 않는다. 난 혼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의 집을 찾을 거고 거기에 남자친구를 초대할 거다. 그전까지는 남자친구가 몸은 저 멀리 있어도 마음은 내 곁에 있어서 매일 밤 노래해준다고 믿으면서 기다려야지. 근데 걔 노래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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