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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겨울

애도의 춤을

스무살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모두 기록하려는 나의 다짐은 가을편을 건너뛰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단 시작했으면 4분의 3이라도 하는 게 나으니까, 그리고 이번 겨울은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유난히 춥고 또 따뜻했으니까, 기록해 본다. 겨울. 나의 스무 살 마지막 계절.




1. 한동안 나의 휴대폰 배경화면이었던 목포 바다. 짝꿍과 만나-회를 먹고-바다를 보고-해산했던 속전속결 목적에 충실했던 목포 여행. 저 커피 참 맛있었는데 그치. 지금은 없는 내 짝꿍.

회.... 하악.....
회.... 하악.....





컨셉: 행복한 숲속의 토토로
컨셉: 행복한 숲속의 토토로

2. 홍대에서 만든 핸드폰 케이스. 무려 만구천원이나 들었지만 돈을 쓴다고 미적 감각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저 귀여운 조각들은 일주일만에 우수수 떨어졌다고 한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진...

3. 보람찬 겨울방학과 체력 향상을 위해, 짝꿍과 배드민턴을 치기로 했다. 첫날, 배드민턴 라켓을 한 손에 들고 쫄랑쫄랑 신나게 징검다리를 건너던 나는 발을 헛디뎠고, 결과는 사진과 같다. 멀리 강물에 떠 있는 것이 나의 배드민턴 라켓이다. 손쓸수 없이 눈앞에서 둥실둥실 떠내려가던 라켓은 아마 지금쯤은 서해바다에 도착했을 것이다. 라켓의 즐거운 여행을 기원한다. 나와 짝꿍은 결국 방학 내내 배드민턴을 치지 않았다.





짝꿍의 생일 축하 칵테일
짝꿍의 생일 축하 칵테일



친구의 초대로 본 뮤지컬. 공연이 끝나고 친구네 집에서 잤는데 어머니께서 파자마를 빌려주셨다. 다이애나의 집에 초대받은 앤이 된 것처럼 신났다.
친구의 초대로 본 뮤지컬. 공연이 끝나고 친구네 집에서 잤는데 어머니께서 파자마를 빌려주셨다. 다이애나의 집에 초대받은 앤이 된 것처럼 신났다.





사정없이 기울어져 찍힌 제주도의 아침.
사정없이 기울어져 찍힌 제주도의 아침.

4. 친구들과 제주도에 갔다. 그동안 나는 바다가 너무 보고싶어서 인천도 가고 목포도 갔는데, 제주에 와서야 알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이 바다구나. 끝없이 펼쳐진 검은 해변과 바다. 그리고 잔인무도한 제주 바람. 혹시 겨울에 제주를 방문할 계획이 있는 긴 머리의 독자가 있다면, 똥머리를 하든 모자를 쓰든 해서 꼭 머리카락을 고정시켜 두길 권한다. 자기 머리카락으로 싸대기를 맞으면 일단 기분이 묘하고, 무엇보다 무척 아프다...

용암의 돌, 검은 해변
용암의 돌, 검은 해변
분홍 동백. 이날 정말 손이 깨지도록 추웠는데 한 커플이 웨딩사진을 찍고 있었다. 좋은 사진을 위한 불굴의 정신력. 두분  백년해로하세요...
분홍 동백. 이날 정말 손이 깨지도록 추웠는데 한 커플이 웨딩사진을 찍고 있었다. 좋은 사진을 위한 불굴의 정신력. 두분 백년해로하세요...
하늘에서... 눈이 와요...
하늘에서... 눈이 와요...

우리가 비행기표를 산 건 몇 달 전 여름. 우리가 제주도를 찾는 바로 그때 기록적 한파가 찾아오리라는 것은 그때 우리의 계산에 없었다. 칼바람을 맞으며 올레길을 걷는 것도,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꽃구경을 하는 것도 모두 견딜 수 있었지만, 동문시장에서 산 천혜향 주스가 10분 만에 얼어버리자 더이상 돌아다닐 수 없었다. 여행이고 뭐고 일단 목숨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여행 마지막 날 고작 오후 두 시에 딱새우를 사다가 숙소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돌바닥에 몸을 지지며 창밖으로 보는 바다는 아름다웠고, 역시 관광은 실내에서 하는 걸로...

찜질방에서 본 제주 바다. 시원한 여름 풍경 같지만 당시 기온은 영하 십 도.
찜질방에서 본 제주 바다. 시원한 여름 풍경 같지만 당시 기온은 영하 십 도.
게스트하우스 인스타그램까지 진출한 나의 낙서...
게스트하우스 인스타그램까지 진출한 나의 낙서...

게스트하우스는 아주 따뜻한 곳이었다. 의자도 침대도 연필꽂이까지도 부드러운 나뭇결이 만져지는 곳. 밤이 되면 사장님과 직원들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나는 따뜻한 우유와 귤을 먹으며 그들의 모습을 그렸다.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있고, 웃음과 인사와 맛있는 음식이 있던 낯선 여행의 밤. 아주 근사한 밤이었다. 근사하다, 라는 말을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어린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날이 밝기 직전 가장 어두운 새벽의 용두암. 그 파도.
날이 밝기 직전 가장 어두운 새벽의 용두암. 그 파도.






빛이 만드는 글자.
빛이 만드는 글자.
빛이 만드는 나뭇잎.
빛이 만드는 나뭇잎.






이 사진만을 남기고 15분만에 장렬히 부러진 스마트폰 삼각대에게 애도를.
이 사진만을 남기고 15분만에 장렬히 부러진 스마트폰 삼각대에게 애도를.
부산타워에서 본 고양이 더블식빵.
부산타워에서 본 고양이 더블식빵.

5. 방학 동안 짝꿍과 나는 참 많이 만났다. 책을 읽고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여행을 다니고 울고 싸웠다. 손 잡고 걷던 그 많은 길들, 낮과 밤, 바다와 하늘, 너의 미소... 입대 전날 짝꿍이 머리를 깎을 때 나는 깔깔대고 웃었다. 못생긴 왕감자 같아! 내가 아무리 놀리고 모자를 빼앗아 달아나도 그저 웃던 너.

훈련소에 들고 갈 사진이 필요하다는 짝꿍의 강력한 주장으로 커플 사진을 찍으러 갔다. 흰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될 걸 굳이 칼정장을 입고 온다길래 왜? 싶었는데, 알고보니 사진 찍고 나서 내 엄마가 있는 영락공원에 갈 생각이었다고. 입대하기 전에 인사드린다고. 딴엔 여자친구 엄마 만난다고 신경쓴 게 웃기고 귀여워서, 일부러 "죽은 사람은 네가 뭘 입어도 못 본다"고 했더니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겨울이 끝났다. 난 2학년이 되었고, 모든 게 바쁘고 피곤한 것 말고는 잘 지내고 있다. 어젯밤에는 줄줄 울면서 날짜를 계산해봤는데 입대한지 겨우 19일 됐더라. 궁상 그만 떨어야지... 곧 봄이 올 것이고 새내기들은 분홍분홍한 옷을 입고 꽃구경을 갈 것이다. 더이상 새내기는 아니지만 나도 꽃무늬 블라우스를 샀다. 슬쩍 따라가려고. 꽃도 보고 술도 먹고 글도 열심히 쓰면서, 씩씩하게 다시 살아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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