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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가르기를 넘어서

한국의 TERF에 대하여

모두가 쉬운 것을 좋아한다. 쉬운 것은 간편하다. 쉬운 것은 재미있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현실을 쉽고 간편하게 설명하는 이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론에 공조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이론은 더 힘을 얻고,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는 ‘한 팀’이 된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 팀. 팀을 나누어서 하는 경기는, 모두가 알다시피, 너무너무 재미있다.

 

한국의 TERF(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이들이 학문적 관점에서 실제로 ‘래디컬’한지는 의문이나, 일단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본인들은 이 용어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한다)가 그렇다. 이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주 쉽고 단순하다. 우리 편과 남의 편. 우리 편은 착하고 정의로우며 남의 편은 그 반대다. 그러니 우리 편이 힘을 합쳐 남의 편을 공격하자. 이들이 행하는 ‘공격’을 굳이 나열하지는 않겠다. 관심이 있다면 트위터에 한번 검색해 보라. 닉네임이 ‘트랜스 ㅇㅇㅇ’ 식이라면 대부분 TERF다.

 

이들의 생각대로 세상이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깔끔하게 나누어진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단 이들이 주장하는 성별이분법과 성기환원주의부터 사실이 아니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말고도 다양한 성별이 존재하고, 이들 역시 여성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젠더와 지정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트랜스젠더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젠더퀴어,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내지 않는 인터섹스. 이러한 이들의 존재는 세상을 우리 편(여자)과 남의 편(남자)으로 나누는 데 방해가 되고, 그래서 TERF는 이들의 존재를 지우고 적극적으로 혐오하는 편을 택한다. 우리 편이 아니라면 남의 편. 공격해도 된다.

 

편가르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 여성은 흉자. 남의 편이다. 비혼, 비연애를 실천하지 않은 기혼 여성, 유자녀 여성도 남의 편이다. 30~40대 페미니스트도 남의 편. 성판매자도 남의 편. 자신과 맞지 않는 의견을 배제할수록 우리 편은 더욱 공고해진다. 남의 편을 공격하는 것은 여성인권을 신장시키므로 정의로운 일이다. 그리고 너무너무 재미있다. 우리 편과 남의 편만 구별하면 되고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쉽고 편하다.

 

세상은 원래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곳이다. 복잡하고 어렵다는 거다. 어려운 세상을 쉽게 설명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그 이론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요소를 납작하고 단순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시선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고, 자칫 폭력적으로 변질되기 쉽다. 보라. 지금 TERF가 가장 열심히 패는(그들이 사용하는 어휘다) 대상은, 원래 ‘남의 편’이었던 남성들이 아니라 같은 여성, 또는 사회적 약자인 퀴어들이다. 이들도 이러려고 페미니즘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역시 그들의 어휘에 따르면) 머릿속이 꽃밭인 사람이다. 나는 TERF와 그렇지 않은 페미니스트의 최종 목표는 똑같다고 믿는다. 암튼 여자가 사람대접 좀 받아 보자는 거 아닌가. 목표가 같다면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간단하다. 쉽고 재미있는 네편 내편 이분법 놀이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머리가 좀 아파도 생각하고 고민해 보자는 거다. '생물학적 여성'은 무엇인가? 같은 여성과 퀴어에게 인신공격을 퍼붓는 게 (비록 재미는 좀 있을지라도) 여성 인권 향상에 정말 도움이 되는가? 물론 이런 질문은 쉽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그치만 내 마음 편하자고 페미니즘 하는 거 아니지 않는가. 여자가 자존심이 있지 어디 쉽고 재밌는 데 만족하나. 편안한 경계를 넘어서 머리 깨지게 고민하고, 연대의 대상을 넓혀 나가는 것. 이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래디컬이 아닐까. 내 생각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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