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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

지난 글에 대한 우려와 부연 설명

지난 16일 나는 '편가르기를 넘어서'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http://posty.pe/uck0ap).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은 변방의 블로그라 누가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많아서 조금 놀랐다. 알고 보니 포스타입 홈페이지에서 이 글을 '지금 뜨는 포스트'로 메인에 올려뒀더라.(작년 초에 내가 한창 글 열심히 썼을 때는 이런 거 안 해줬으면서...) 주제가 주제인만큼 조회수가 올라갈수록 오독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그럴 만한게 글을 올린 바로 다음날 달린 댓글의 내용이 이것이었다. "공감한다. 요즘 성별 갈등도 심하고 페미니즘의 의미가 변질된 것 같다."

이 댓글에 대답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이렇게 읽은 독자가 또 있을까봐 다시 글을 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앞의 글을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다. 내가 비판한 것은 성별 갈등이나 소위 '변질된 페미니즘'이 아니다. 이것들은 주로 안티페미니스트의 논리이고 나는 여기에 반대한다.

그러나 (댓글을 남겨주신 분을 비롯한 일부) 여러분이 내 글을 오해한 것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다. 사전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은 내 탓이다. 뒤늦게 설명하자면 내 글은 페미니즘 대 안티페미니즘의 대결구도(?)가 아닌, 페미니즘 내의 노선 갈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내용은 여성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이, 복잡한 갈등 상황을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한 것이므로 당연히 무척 부정확하고 이분법적이다. 부디 전부 믿지 마시고 페미위키에 검색이라도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 지금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를 아주 아주 거칠게 이등분하면 TERF와 교차페미니스트로 나눌 수 있다. 두 진영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트랜스젠더를 여성으로 인정하는가, 퀴어·인종·사회계급 등의 문제를 페미니즘 안으로 포용하는가에 대한 입장이며(두 질문 모두에 예라고 답했다면 교차페미니스트 진영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 외에도 여성의 주체적 꾸밈 또는 주체적 성노동이란 존재하는가, 기혼·유자녀 여성은 가부장제의 부역자인가, 그리고 최근에는 예멘 난민 수용이 옳은가까지 수많은 의제에서 두 진영은 의견 차이를 보인다.

평화롭게 의견 차이만을 주고받았으면 참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 TERF들은젠더퀴어와 트랜스젠더, 교차페미니스트와 기혼·유자녀 여성, 나아가 장애인과 난민들까지 공격하고 있고, 나는 그러한 행동이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런 내 견해를 밝힌 게 앞의 글이다. 요약하자면 내가 앞의 글을 통해 비판한 것은 페미니즘 내의 방법론이지 페미니즘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주절주절 설명하는 게 의미가 있는가? 내 과문한 글이 아니더라도, 여성 페미니스트 사이의 비판과 갈등이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는 "페미들이 또 지들끼리 싸운다" 정도로 읽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TERF를 비판하는 교차페미니스트의 글이 남성들에게는 "워마드한테 일침 놓는 개념녀" 정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TERF에서 시작된 논의(탈코르셋 운동, 혜화역 시위 등)가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TERF의 공격이 대부분 사이버 불링에 해당된다면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가해는 실제로 생활과 목숨을 위협하는 정도의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내게 주어진 제한된 발언권을 외부가 아닌 내부를 비판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종류의 운동이든 내부의 노선 갈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백한 외부의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부의 싸움은 소모적이고 자기파괴적인 것이 아닐까? 앞의 글을 올리면서도 했던 고민이지만, 아직 나는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다. 지난번에 밝혔다시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그냥 모두 손잡고 하하호호 웃으며 함께 싸우는 거다. 그렇지만 역시 지난번에 밝혔다시피 세상은 그렇게 단순한 곳이 아니고...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다. 내가 TERF의 일부 의견에는 동의하고 다른 의견에는 격렬히 반대하더라도, 그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면 나는 그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싸울 것이다. 그도 내가 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래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대체 뭔 소리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페미니즘을 전혀 모르거나 끔찍히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끼리 아무리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결국 우리의 공통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는 성별에 의한 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성이 동등한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페미니즘이 지금 어떤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진 후 우리는 다음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글에 이어 또 머리속이 꽃밭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예 헛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둠 속의 희망'에서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희망은 투시력-이 세계가 처한 곤경을 이해하는 힘-과 어쩌면 불가피하지도 불변적이지도 않은 이런 상황 너머 무엇이 가능한가를 내다보는 상상력을 요구한다." 나는 희망의 힘을, 변화의 힘을 믿는다. 페미니즘이 바로 그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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