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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왕이 될 거야(2)

정리를 포기한 눈물의 영업쑈

첫번째 글을 쓰고 나서 급격한 체력 저하(...)와 의욕 부족으로 남은 책들은 좀 짧게 정리하기로. 열네 권 남았는데 이걸 언제 다 독후감 써...

가네코 후미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일본의 천황과 조선 식민통치에 반대했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 연인 박열과 함께 항일운동단체 불령사를 조직했던 그는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감옥에서 이 수기를 썼고, 얼마 후 스물세 살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나는 그의 이름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처음 들었다. 최희서 배우가 연기한 가네코는 뻔뻔하고 명랑하고 어딘가 살짝 미친 것 같은, 서슬 퍼런 눈을 가진 용감한 여성이었다.

시 한 편을 읽고 당장 시인을 찾아가 "나와 동거하자"라고 말하는 사람,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천황의 증서를 받자마자 눈앞에서 찢어버리는 사람.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죽음을 앞두고 감옥에서, 가네코는 자기 연민 없는 건조한 어조로 이 질문에 대답해 나간다. 무적자(호적에 오르지 못한 자)로 태어나 있어도 없는 취급을 당했던 어린 시절, 가족의 학대와 지독한 가난에 맞서야 했던 삶이었지만 가네코는 절망하거나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대신 끝없이 배우고 고민하며 투쟁 정신을 키워나간다. 젊은 여성 행동가의 날카롭고 단단한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책으로, 나는 교훈이라기보다는 그저 탄복하고 감동하면서 읽었다. 

"나도 하쓰요 씨와 마찬가지로 이미 이렇게 된 사회를 만인이 행복한 사회로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렇다 할 특별한 이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하쓰요 씨와 다른 생각이 있었다. 비록 우리가 사회에 이상을 가질 수는 없어도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 자신만의 진정한 일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 일이 성취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진정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진정한 삶이다.

  나는 그것을 하고 싶다. 그 일을 통해 우리의 삶이 즉시 우리와 하나가 된다. 멀리 저편에 이상적인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현상은 현상으로는 없어져도 영원의 실제 속에 존속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평안하고 고요하며 냉정한 마음으로 이 조잡한 수기의 펜을 놓는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 축복 있으라!"


박연선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 버스도 안 다니는 첩첩산중 시골 마을 두왕리. 삼수생 손녀, 욕쟁이 할머니, 그리고 까칠한 미소년 트리오가 15년 전 네 소녀 실종 사건을 파헤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미스터리를 썩 좋아하지 않는데 이건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즐겁게 읽었다. 좀 무서울 만큼 리얼한 시골 마을 묘사와 스물한 살 여자애라기보다는 vj특공대 성우 같은 주인공 강무순의 맛깔나는 입담이 장점. 영화화되면 진짜 재밌을 것 같다. 나는 무순-이수경 배우, 할머니-나문희 배우, 창희-그냥 잘생긴 남자애로 떠올리면서 읽었다. 무순이와 할머니는 연기력만 되는 배우라면 다 잘하겠지만 창희는 반드시 무조건 잘생겨야 하기 때문에 캐스팅에 난항이 예상된다. 아무렇게나 생긴 애를 데려와서 잘생김을 연기한다 이런 말로 뭉개면 가만있지 않을 것.


마야 안젤루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 미국의 수필가, 시인, 배우, 흑인 인권 운동가, 식당 조리사, 오페라 수석 무용수, 전차 운전기사, 작곡가, 시사잡지 편집인, 비서, 마담뚜, 토니상에 노미네이트된 뮤지컬 배우, 스트립 댄서, 문학 교수, 자동차 정비공까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을 살았던 마야 안젤루의 자서전. 이 책은 뉴욕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의 기록을 세우고 미국 고등학생들의 필독 교재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지만 나는 이 사실을 책을 다 읽은 후에 처음 알았다. 내가 이 책을 고른 건 순전히 알라딘에서 파격적인 가격으로 90일 대여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고 아마 지금도 제공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달려가서 읽어보시길. 알라딘 만세.

감각적인 문장, 서정적이다, 강렬하다, 아름답다, 흑인 여성 아동으로서 겪었던 다양한 층위의 차별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같은 문장들을 한번씩 써 보고 다 지웠다. 나는 찬사에 별로 소질이 없다. 찬사하고 싶은 대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해야겠다. 이 책의 한국판 작품 해설의 제목은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의 마야 안젤루, 그녀는 천사인가 창녀인가?'이다. 대체 책을 읽기는 한 것인지 궁금해지는 이 해설을 쓴 사람의 이름은 김 욱 동이다. 


장은진 <날짜 없음> - 끝없이 회색 눈이 내리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재난 로맨스.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회색인'이 되어 도시를 떠난다. 하지만 의사인 해인과 구두 수선공인 그, 그리고 늙은 개 '반'은 떠날 수 없다. 해인과 그는 사랑에 빠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이고, 아직 서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셋은 그의 구둣방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차례로 그들을 찾아온다. 모든 것이 끝나기 전 마지막 하루, 셋은 꼭 끌어안고 고요히 끝을 기다린다.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와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가 떠오르는 소설. 5월의 한가운데서 읽어도 어느새 혼자 겨울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만큼 한없이 춥고 쓸쓸하지만, 작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오가는 두 연인의 대화는 아주 작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온기를 전한다. 연인의 단추를 엉뚱한 색으로 꿰매면서 '끝이 찾아와도 이 단추로 당신을 찾아낼 수 있어. 당신을 꼭 찾아내서 다시 연애할 거야'라고 말하는 모습은 일단 너무 귀엽고, 근데 너무 슬프고, 그럼에도 또 너무 사랑스럽다. 태양이 사라지고 국가와 사회가 정지해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하고, 개 한 마리를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한다. 다 죽게 생겼는데 그게 대체 무슨 헛짓거리란 말인가. 그 헛짓거리가 너무 좋아서 나는 책을 읽는다.


제인 오스틴 <설득> - 오스틴 소설은 표지도 고상하고 제목들도 우아해서 읽기 전에는 조금 주눅드는데 막상 펴보면 "헐 대박ㅡㅡ 그래서 걔랑 사귄다고???" 정도의 리액션을 남발하면서 집중해서 읽게 된다. 특히 작가가 대놓고 등장인물들을 흉보는 부분이 가장 꿀잼이다. <설득> 역시 제목을 <앤과 바보들>로 고쳐야 할 만큼 각종 속물들과 허영쟁이와 거만쟁이들이 등장하는데, 경멸을 전혀 숨기려 들지 않는 작가와 달리 주인공 앤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원만하게 잘 지낸다는 게 재미있다.

읽는 내내 오스틴의 시대에 살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설득> 속의 좁디 좁은 시골 사교계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곳이다. 나도 친구가 별로 없긴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속 친구가 없는 것과 달랑 대여섯 명 속에서 친구가 없는 건 다르다고... 그리고 난 아마 루이자와 헨리에타 같은 사람에게 엄청 뒷담화 당할 것이다. "어쩜 저렇게 무뚝뚝하고 성미가 사나운지 알 수 없어요. 교양이나 우아함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고, 그렇다고 얼굴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누군지 몰라도 저 사람과 결혼할 남자는 참으로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홍재희 <그건 혐오예요> - 영화감독 홍재희가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비인간동물 등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천착해온 6인의 영화감독들과 진행한 인터뷰 모음. 사회적 차별과 혐오 문제를 이론적, 학술적으로 다루는 대신 현장에서 싸워온 감독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하기에 어렵지 않고 친절하게 다가온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나 비인간동물 문제의 경우 내가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주제라 배운 것이 많았다. 소수자 인권과 동물권을 공부하는 입문서로 좋을 듯.


애거서 크리스티 <빛이 있는 동안> - 우리 학교 도서관에는 크리스티의 전집이 1권부터 끝까지 나란히 꽂혀 있다. 마침 여름이 다가오고, 지금까지 그의 책을 한 권도 안 읽었다고 하기도 뭔가 창피하고, 그래서 일명 '크리스티 도장 깨기' 계획을 세웠는데 방학에 집에 내려오게 돼서 중지됐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전집 없단 말이야. 힝.

아무튼 <빛이 있는 동안>은 크리스티 전집의 첫 권이자 그의 미발표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흔히 크리스티를 추리소설의 황제로 칭하지만 이 책에는 추리 요소가 별로 많지 않다. 오히려 판타지나 멜로에 더 가깝다. 숨막히는 두뇌싸움을 상상했는데 서정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기분 좋게) 놀랐다. <벽 속에서>와 표제작 <빛이 있는 동안> 같은 단편들은 조금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삼각관계 이야기임에도 정말 많이 슬프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모험>에서 그 전설의 에르퀼 푸아로를 처음 보았는데 너무 귀엽고 친절한 아저씨라서 빵 터졌다.(<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조금 읽고 푸아로를 귀여워하는 내 마음은 더욱 커졌다) 크리스티 선생님, 귀여운 분이셨잖아?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감히 미스터리의 황제에게 귀엽다고 한 벌이라도 주려는 듯 전집의 2권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만 빼고 다 읽어본,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미스터리 소설을 출간 79년 뒤에 읽고 세상에 너무 재미있다! 최고다! 라고 말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창피하기나 하지... 크리스티의 그 많은 작품 중 아직 두 권밖에 안 읽었으므로 앞으로도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면서 감탄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신난다. 아직 안 읽으신 분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빨리 읽으세요. 같이 수선 떨어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벌써 7월이 끝났고... 상반기 정리 다 하면 하반기 끝나는 거 아닌지... 내가 왜 이걸 시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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