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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모든 이름

7월의 생각들

0.

두서 없고 구질구질한 신세한탄과 드라마 <굿 플레이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안 그런 대학생이 뭐 얼마나 있겠냐마는 종강 직전의 나는 젖은 휴지만큼 힘이 없었다. 지난 학기보다 수업은 많아졌고 과제도 그만큼 늘었고 친구들 얼굴 보기는 그만큼 힘들어졌고 군대 간 남자친구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울고 생난리를 쳤으며 그 와중에 내가 책임져야 할 신문 발간은 2주마다 꼬박꼬박 찾아왔다. 바보 같은 실수를 했고 가끔은 무책임했고 애먼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맡은 일 중 뭐 하나 똑똑하게 끝내지 못했다. 기숙사 앞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와서 안주도 없이 빨대 꽂고 쪽쪽 빨아마신 다음 울다 잠드는 날이 많았다. 그마저도 음량 조절을 못해서 영문도 모르는 룸메이트가 토닥여 주는 날도 있었다. 6개월 동안 6kg이 빠졌다. 네이버에 번아웃 증후군을 검색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딱히 뭘 burn하지도 않았고 그냥 대충 살았는데 왜 이렇게 지쳤을까. 지쳤다. 고요한 곳에 가고 싶다. 거기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쉬고 싶다.

고요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나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아무 소리 없는 곳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는 고요 속에서 오래오래 쉴 수만 있다면. 서른 명의 여자애들이 바글거리는 고등학교에서도 그랬고, 집에서 세 시간 거리의 대학에 입학하면서 가족과 싸울 때도 그랬고, 그 대학에 입학해서 대면식이다 모임이다 여기저기 불려다닐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날 딱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내게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걸까. 이렇게 시끄럽고 요란하게. 도망칠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는 고함과 속삭임이 나를 가장 괴롭혔다. 음악도 듣기 싫었고 영화도 예능도 유튜브도 싫었다. 조용한 곳, 조용하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2.

그래서 여름방학 중 기숙사 이용을 신청했는데 할머니가 마음에 걸렸다. 아주아주 가끔 전화를 걸 때마다 할머니 목소리는 점점 더 안 좋아졌고 나는 당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번 방학에 집에 있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줄줄 울면서 입사를 취소하고 집에 내려왔는데 첫날부터 후회했다. 맞다. 내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던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일단 살아남아야 효녀든 효손녀든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까먹었는데 나는 원래 전혀 효녀가 아니었다.

학기 중에는 내게 가족이 있다는 걸 잠시 잊었고 그래서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익숙한 끔찍함이 다정하게 나를 맞았다. 집에는 세 시간 강의나 조별과제 같은 흉악한 것들은 없었지만 대신 이년 저년 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과 아침 일곱 시에 억지로 깨워 따뜻하고 건강한 밥을 먹이는 사람이 있었다.(욕보다 아침밥 쪽이 열 배는 괴로웠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일 경우에는 이 사람을 미워해도 되는가라는 윤리적 고뇌까지 추가된다. 할머니는 내 얼굴이 고춧잎싹처럼 말랐다며 자꾸 억지로 뭘 먹이려 했고 난 차라리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우리 집은 3층이라 아마 안 죽고 다리 정도만 부러질텐데 그럼 고함이라도 좀 덜 지르지 않을까? 그럴 리가. 그래도 나는 두들겨맞지는 않으니까 운이 좋다. 그건 내 동생 역할이다.

평소 가족에 대한 생각은 필사적으로 피하는 편인데 이렇게 집에 있을 때는 그게 쉽지 않다. 10대 때 나는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난 피해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야 나를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그럼 과연 누가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 가장 처음으로 잘못한 건 누구인지 뭐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잘못됐는지 우리는 서로에게 끔찍하게 잘못했고 지금도 잘못하고 있는데 그럼 대체 어떡해야 하는지 사방천지에 나한테 엄청나게 잘못한 사람들밖에 없는데 내가 그 사람들한테 좀 잘못했다고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지 이제는 모든 게 잘못될 대로 잘못돼서 아무도 잘못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잘못하고 잘못하다가 영원히 잘못할 것인지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아는데 내가 진짜 그렇게 잘못한 건지 그 사람들이 나한테 잘못한 건 어떻게 보상받는지 난 보고 배운 게 잘못된 것밖에 없는데 그럼 앞으로 친구한테도 잘못하고 애인한테도 잘못하고 잘못된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 잘못된 사람도 좀 행복할 수는 없는지 제발 씨발 좀 행복하면 안되는 것인지... 여기까지 생각하면 보통 편의점으로 술을 사러 가는데 집에서는 술도 못 마신다.


3.

종강하자 시간이 갑자기 많아져서 책을 읽었다. 열심히 읽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원래 소설밖에 안 읽었는데. 기초 지식이 없으니까 당연히 어렵고 줄거리가 없으니까 별로 재미도 없었는데 독서 노트에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정말 열심히 읽었다. 조금씩, 똑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똑똑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든 건 아마 올해 초부터. 스무 살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늘 반에서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였기 때문에.(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부도 제일 잘하고 말도 제일 잘하고, 약간 제 잘난 맛에 살았던 것 같다. 우쭐거리는 애였다는 게 아니라, '똑똑한 아이'라는 요소가 자아정체성에서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게 자존감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었던 거다. 아니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더 재수없어지잖아... 암튼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대학에 오면서 세상은 넓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됐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건 별로 놀랍지 않았는데, 내가 아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건 꽤 충격이었다.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하니까 좀 창피한데,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이 정말, 정말 많았다. 그리고 다들 자기의 관심 분야를 하나씩 정해서 깊이 공부하고 있었다. 윤리교육과인 룸메이트는 스피노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나: "아! 그 사과나무!") 남자친구는 내가 아무 상황을 제시하면 관련 법 조항을 읊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다못해 미국 팝 컬처를 좋아하는 친구마저 내 눈에는 멋져 보였다. 나는 케이티 페리를 그 친구를 통해 처음 알았다.

글을 쓰고 읽으면서 내 지식의 얕음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잘 쓴 소설을 읽을 때는 내가 소설을 쓸 게 아니므로 그냥 재밌게 읽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잘 쓴 분석 기사, 잘 쓴 칼럼, 잘 쓴 평론, 그리고 눈물 나게 잘 쓴 에세이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아득해졌다. 전에는 미문(美文)에 감탄했지만 이제는 저자가 주장을 전개하고 문장과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탄복한다. 그리고 저자의 폭넓은 지식에. 고등학교는 문과로 졸업하고 생물학과에 입학했다가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따고 철학과 정치학을 또 공부한 다음 미술 에세이를 발표하는 미친 인간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다.

똑똑해지고 싶어졌다. 한 가지를 정해서 그것만은 깊이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남의 글을 읽지 않고도 스스로 어떤 의견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지식을 갖고 싶어졌다. 몇 년 전에는 별명이 공부 잘하는 바보였는데 공부마저 못하면 이제 그냥 바보 아냐.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것저것 읽기 시작한 건데 자꾸 조바심이 들었다. 그동안 통 책을 읽지 않아서 (그리고 아마 트위터 때문에)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다. 한 권을 붙들고 있는 게 힘들었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어봤다. 마구잡이로 들어온 지식은 떠다니는 먼지처럼 머리속을 잠시 부유하다가 사라졌다. 딴 건 몰라도 책 하나는 진짜 좋아하고 잘 읽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조차 아니야! 친구들이나 동료 기자들한테는 뭘 많이 아는 척 허세 부리는 기술만 늘었다. 밤이 되면 어떤 책도 읽히지 않았다. 불안했다. 불안이 커진 밤이면 좋아하는 책을 필사했다. 적어도 내가 글씨는 아직 예쁘게 쓴다는 게 위안을 주었다. 호프 자런의 <랩 걸>을 필사하다가 '놀라운'을 '중요한'으로 잘못 적었다. 나무가 겨울에도 살아남는 비법을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마음을 들킨 기분이 들어 고치지 않고 두었다. 나는 이제 단순히 놀라운 것에 만족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중요한 말을 하고 중요한 글을 쓰고 싶다. 그러지 못해서 불안하다. 아니, 불안하니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불안은 이제 나를 따라다닌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4.

아직 불안에게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 어쩌면 그냥 심박수가 좀 높아진 건데 내가 불안이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로 해질 무렵, 그리고 잠들기 전, 불안은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왔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도저히 침착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귓바퀴 앞 혈관에 손가락을 대고 심장 박동 수를 세었다. 아무리 세어도 심박수는 정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잠을 못 자는데 지금.

카페인 때문일 수도 어떤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내 잘못 때문일 수도. 우리 할머니 왈 옛날 말씀 틀린 거 하나도 없다고 지은 죄가 많으니까 제발 저리는 거다. 무엇이 불안한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불안하고 두렵다. 또는 무엇이 불안한지 사실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게 두렵다. 나는 미래를 상상하지 못한다. 아주 가까운 미래도, 이를테면 당장 한 달 후 개강도 나는 떠올릴 수 없다.(아니 이 경우에는 떠올리기 싫은 게 맞을지도) 할머니는 임용고시 준비를 이야기하고, 학과 동기들은 교사가 된 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짝꿍은 아주아주 먼 별세계를, 이십년 뒤 삼십년 뒤 솜사탕 같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나는 웃으며 대답하지만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내가 스물두 살이, 서른 살이, 쉰 살과 아흔 살이 될까? 어떻게 다들 아무렇지 않게 죽음의 가능성을 배제하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아무 이유도 명분도 없이 그냥 갑자기 죽는다. 사랑하는 모든 것, 순진하게 키워온 모든 복숭아빛 꿈을 가위로 싹둑 자르듯이 한순간에 죽는다. 나는 그 모습을 직접 보았다. 나는 미래를 믿지 못한다.


5.

자존감을 타인에게 위탁하면 안 된다.


6.

역대 최악의 더위라고 한다. 말했다시피 내 방에는 에어컨이 없고 그래서 잘 때 빼고는 항상 거실에 나와 있는다. 그 말은 하루종일 종편 채널 프로그램을 보거나, 적어도 소리만은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ytn, 채널A, mbn, 연합뉴스... 쉬지 않고 종편 방송만을 내보내는 tv 앞에 매일매일 앉아있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것은 고문이다. 농담이 아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20대 진보성향 페미니스트에게 동치미, 아궁이, 고부열전, 아내의 맛, 아빠본색, 모란봉클럽, 이제 만나러 갑니다, 이것은 실화다, 그리고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진부한 여행프로들을 한 달동안 틀어줘 보아라. 그는 곧 머리를 쥐어뜯고 뒹굴기 시작할지니... 재미 없고 불쾌하다는 점에선 공중파 예능도 다 똑같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건 시사와 뉴스 프로. 중년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 떠드는 대낮의 종편 뉴스프로를 시청당하고 있자면 언론 보도 및 취재 윤리와 인간으로서의 품위, 침묵의 미덕, 그리고 지난 20년 인생 전체에 대해 회의가 밀려오기 시작한다. 아무리 휴대폰에 정신을 집중시켜도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다. 결국 정신적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종편으로부터 도망쳐 에어컨 없는 방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다른 차원의 고통이 시작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얇은 껍질이 물이랑 단백질 같은 속을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만두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한국인은 사실 화성인이 올해 가을에 먹으려고 찜기에 넣어놓은 고기만두가 아닐까? (찐만두는 한국인의 꿈을 꾸는가?) 더워서 약간 혼미해진 정신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굿 플레이스>를 보다가 깨달았다. 그래! 여기는 배드 플레이스였어!! 우린 이미 다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지옥에 온 거야!!! 내가 엘리너고 엘리너가 나였다. 지은 죄가 있으니 배드 플레이스행 처분에 불만은 없지만, 같은 지옥이라도 엘리너에게는 치디 같은 미남과 프로즌 요거트라도 주어지는데 왜 내겐 불더위뿐인가 그건 좀 억울하다. 그래도 내가 엘리너보다는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내게도 애인이 있긴 한데 불더위 때문에 그 애인한테 매일 짜증만 내고 있단 말이다. 이러다 차이면 다 날씨 때문이다.


7.

마음의 이름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아직 내 마음 중 어떤 것에도 이름을 지어 주지 못했다. 불안, 죄책감, 미움, 사랑, 슬픔, 그리고 희망. 많이 불리고 그만큼 닳아서 조약돌처럼 반짝이는 단어들을 들여다본다. 두려움에 처음 두려움이란 이름을, 다정함에 처음 다정함이란 이름을 지어준 누군가를 생각한다.

엄청나게 뜨겁고 습한 스물한 살의 여름이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모든 마음들을 들여다본다. 못나고 흉하고 모서리에는 아직 파랗게 날이 선 마음들을, 일단 이름 붙이지 않고 거기 두기로 한다. 언젠가 그들 모두에게 꼭 맞는 다정한 이름을 지어 불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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