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마음의 모든 이름

읽고 듣고 본 것들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만드니까

“당신은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

“내가? 삶이 끔찍해.”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만드니까.”

언젠가부터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대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삶이 끔찍해.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만드니까. 끔찍한 기분이 들 때마다, 삶이나 세상이나 나 자신이 끔찍해질 때마다. 절망하는 목소리와 싸늘한 목소리의 이중창으로. 내가 아니라 삶이 끔찍해. 그렇겠지. 네가 그렇게 만드니까...

이 대화를 주고받는 이들은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 부슈만과 그를 짝사랑하는 슈타인 박사다. 삶이 끔찍하다고 애원하는 쪽이 슈타인 박사, 인정사정없이 팩트로 두들겨 패는 쪽이 니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이 책은 나의 성경이었고 니나는 나의 예수였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 역시 니나의 가르침을 전혀 따르지 못하고 살았으며 가끔 니나를 원망했다. 니나처럼 강하고 유능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야 얼마든지 불나방처럼 삶에 뛰어들 수 있었겠지만, 나 같은 인간은 어쩌란 말인가. 나는 불나방이 아니라 꾸물꾸물 쌀벌레이고 그저 꾸물꾸물 살고 싶은데, 삶 쪽에서 불을 뿜으며 다가오는 걸 어쩌란 말인가. 내가 아니라 삶이 끔찍해! 그러면 대부분의 현자들이 그러듯 니나도 조용히 대꾸한다.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만드니까.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 적이 있다. 고3 때였다. 엉엉 울면서, 세상에 내 편은 아무도 없으니 나라도 나를 애지중지 챙기고 편들어 주겠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쓸모없는 다짐이었다. 나는 이미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이미 나만 챙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신을 순전한 피해자의 위치에 놓았고 내가 저지른 잘못은 몰랐거나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다. 그게 당시의 나로서는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꼴랑 2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내 나이의 앞자리 숫자는 달라졌고, 이제 “몰라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가 별로 사실도 아니며 더이상 나를 보호해 주지도 못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뭘 잘못했다손 쳐도 그래서 뭐 어떡하라는 말인가? 그것은 내 잘못이었지만 내 잘못만은 아니었다.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뒤틀린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니나와 슈타인의 대화를 몇 번이고 반복재생했다. 당신은 정말 끔찍한 사람이군요. 내가? 삶이 끔찍해.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만드니까...


이건 뭔가 되게 많이 잘못된 것 같아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이랑의 노래 ‘가족을 찾아서’를 들을 때마다 내가 찾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가족과 살 때는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이 찾고 싶었고, 대학에 와서 동기들이 하나둘 연애를 시작할 때는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이 찾고 싶었다. 지금 가장 찾고 싶은 것은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이다. 본가도 아니고 기숙사도 아닌 바로 나의 집. 아아 그 집은 12시에 층장이 방마다 찾아다니며 점호를 하지 않고, 사방에 폭신폭신한 이불과 베개와 바디필로우가있고, 쪼그려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좁은 다락방이 있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대형마트와 공원이 있고... 그리고 두렵지 않은 곳이다. 나의 집. 아무 두려움도 없이 아기새처럼 잠들 수 있는 나의 집.

지금 살고 있는 집이나 기숙사라고 누가 쫓아와 괴롭히는 건 아니다. 나를 쫓아와 괴롭히는 건 나의 두려움이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밖에 있을 때면 실체 없는 불안함이 찾아와 빨리 집에 가라고 재촉했다. 낯선 곳은 무서우니까 집에 가야 한다. 그런데 집이 어디 있지? 지금 사는 이 집은 아니다. 한 학기마다 옮겨다니는 기숙사도 아니다. 내 집은 어디에 있지? 상상 속에서 그 집은 부산에 있기도 했고 제주도에 있기도 했고, 가끔은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었다. 아무튼 그 집은 늘 이곳에서 아주 멀었고 아주 조용했다. 내가 초인종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전화도 없고 tv도 없고, 가끔은 인터넷도 잘 되지 않았다. 인터넷은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쉴 새 없이 정보가 쏟아져서 피곤하니까. 실제로 나는 어느 날 밤, 끝없이 밀려들어오는 텍스트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트위터 어플을 삭제해 버린다.

방금 이 문장이 독자들에게 충분한 충격을 안겨주지 못할 것 같아 걱정되는데, 지난 3년간 나는 모두가 인정하는 트위터 중독자였다. 트위터로 남의 고양이 사진도 보고 물건도 사고 이주승 덕질도 하고 공부도 했다. 자기랑 있을 때는 트위터 좀 그만 보라는 남자친구에게 “내가 목숨은 끊어도 트위터는 못 끊는다”고 농담하곤 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거다. 그제야 나는 내가 정말 많이 지쳤다는 걸 실감했다. 여름방학 두 달 동안 공부도 알바도 안 하고 집에서 실컷 놀았는데 왠지 너무 많이 지쳐 버린 거다. 다음 주가 개강인데.

‘가족을 찾아서’의 후렴은 이렇다. “이건 뭔가 되게 많이 잘못된 것/같아 이건 뭔가 되게 많이 잘못/된 것 같아 이건 뭔가 되게 많이/잘못된 것 같아 잘못 된 것 같아” 두 번 반복. 하지만 내가 부를 때는 이 부분만 열 번씩 스무 번씩 반복하게 된다. 이건 뭔가 되게 많이 잘못된 것 같아 이건 분명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아 이건 왠지 너무 많이 잘못돼 버린 것 같아...


크레이지 걸프렌드

충동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트위터도 그만뒀으니 책도 열심히 읽고 자기계발도 좀 하면서 살 줄 알았지.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한 걸까. 난 트위터 중독에서 벗어난 지 하루 만에 넷플릭스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푹 빠진 컨텐츠는 뮤지컬 드라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일명 크엑걸). 시즌 2의 오프닝에서는 주인공 레베카가 빨간 반짝이 원피스를 입고 노래한다.

I'm just a girl in love
I can't be held responsible for my actions
I have no underlying issues to address
I'm certifiably cute and adorably obsessed!

난 그저 사랑에 빠진 소녀예요. 난 내 행동에 책임 같은 거 질 줄 몰라요. 내게 숨겨둔 문제 따윈 없어요. 좀 미친 것 같지만 귀엽고, 집착하지만 사랑스러운 걸요!

...라고 말하며 레베카는 전 남자친구 조쉬를 스토킹하고, 조쉬가 애인과 헤어지게 하기 위해 무리수와 범법행위를 남발한다. 내면의 망가짐을 이기지 못하고 커리어와 인간관계를 우르르 망쳐가는 레베카를 바라보며, 나는 못돼처먹었게도 조금 안도했다. 내 인생은 레베카보다는 좀 나은 것 같아..!

하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방학동안 한 바보짓을 돌이켜보면 크엑걸의 훌륭한 에피소드 한 편이 나올 것이다. 다만 이건 실전이기 때문에 비참한 상황에서 갑자기 댄서들이 등장해 춤을 춰주는 일도 없고 등장인물들이 주인공의 미친 짓을 그냥 그런 갑다 하고 넘겨 주는 일도 없다. 나는 허상을 두려워했다. 내게 그렇게까지 악의가 없는 것들에 잔뜩 위축되어 눈치를 살폈고 벌벌 떨었고 눈물을 쏟았다. 한심하고 미운 쪽은 나였다. 하루는 휴가 나온 남자친구를 기약 없이 반나절을 기다리게 하고, 버스로 광주를 가로지르게 하고, 결국은 애처럼 엉엉 울린 다음에야 나는 내가 레베카와 별로 다를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엑스'가 아니라는 게 더 비극이다). 그리고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레베카 번치는 가상의 인물이며 그를 창조한 것은 엄청나게 똑똑하고 재치 있고 재능 있고 아름다운 레이첼 블룸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불안과 부족함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서 골든 글로브 상을 받는다. 누군가는 그 드라마를 애청하면서 실제로 남자친구를 울리고...


이 글을 거의 다 써둔 채로 임시보관함에 처박아 놓았었다. 그 사이에 시간이 좀 흘렀고 2학기가 시작했고 오늘은 반바지를 입고 야간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추워 죽을 뻔했다. 계절이 변했다.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여전히 훌륭한 것들을 보고 읽고 들으면서, 그리고 그 아웃풋으로는 형편없는 블로그 잡담이나 쓰면서. 좋은 딸도 언니도 친구도 애인도 편집장도 아니지만. 그것에 너무 위축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양지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