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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28 어제의 일기

온 여름을 이 하루에

1.

아침의 협재 바다는 눈부셨다. 물놀이를 위해 수영복 위에 옷을 걸쳐 입으면서 고민했다. 숙소에서 해수욕장까지는 걸어서 고작 2분 거리. 해수욕장은 온통 모래밭이라 옷을 벗어둘 곳도 없다. 그리고 여기는 제주도가 아닌가! 여행! 젊음! 바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숙소에서 두 명 봤다) 개방적인 분위기! 그리고 내일이면 안 볼 사람들!

결국 우리는 과감하게 옷을 포기하고 수영복만 입은채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아니 사실 하나도 안 당당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아침이라 사람도 별로 없는 동네를 활보하는 비키니 3인방! 햇볕이 내리는 이른 아침에~ 비키니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비키니(봉이) 파란 비키니(나) 하얀 비키니(공주)~ 좁다란 골목길을~ 비키니 셋이서~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2.

오전의 협재 바다는 눈부셨다. 반짝이는 초록색 물결에 몸을 맡기고 튜브에 드러누워 있으려니 행복이 선명하게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지금 친구들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 배로 행복해졌다. 파도는 다정하고, 모래는 폭신하고, 가끔 밟으면 발바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픈 검고 거친 현무암만 조심하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아직 많지 않고, 외국인 커플 한 쌍이 물에 둥둥 떠 키스하고 있을 뿐이었다.(안 넘어질까?) 육지에서는 호우 경보가 내렸다는데 제주의 하늘은 파랗고 화창하고, 넓었다. 바다가 있는 곳은 하늘도 넓고 깊어지는가보다, 생각하며 오래오래 물 위에 떠 있었다. 오래오래...

그리고 그날 오후부터 봉이의 양 팔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급기야 작은 두드러기 같은 것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옷자락만 스쳐도 따끔거린다고. 나 역시 수영복 모양 그대로 어깨에 빨간 경계선이 생겼다. 너무 선명해서 내년 여름까지 안 없어질 것 같다. 오늘의 교훈, 여름철 물놀이를 할 때는 온몸에 썬크림을 골고루 바릅시다... 공주는 별명답게 혼자 멀쩡한 피부를 자랑했다.



3.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고기국수를 먹었다. 좀 싱거웠지만 즐거웠다. 쨍한 파란색 바탕에 쨍한 분홍색 꽃무늬가 강렬한 찰랑찰랑 팔랑팔랑 원피스를 샀다. 여기 말고는 아무데서도 못 입을 디자인이었지만 즐거웠다. 또 하얀 꽃팔찌를 샀다. 이게 끊어지는 게 빠를지 내가 이걸 잃어버리는 게 빠를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예쁜데 뭐 어떠냐 싶고 즐거웠다. 쇼핑을 마치고 나서는 드러누워 낮잠을 잤는데 낮잠마저도 마냥 즐거웠다. 아!!! 수업 빠지고 돈 쓰면서 노니까 너무너무 재밌다!!! 평생 일 안 하고 돈이나 펑펑 쓰면서 살고 싶다!!! 세 시간 뒤 다시 바다를 찾아가자, 우리가 꿈꾸는 사이 파도는 저 멀리 물러나고 바다는 드넓은 모래밭이 되어 있었다. 오후의 협재 바다, 아니 협재 모래밭은 그래도 눈부셨다.



4.

별 재미 없는 게스트하우스 파티가 끝나자 아홉 시였다. 우리는 네 캔 만원 세계맥주와 새우깡을 사들고 다시 바다로 나왔다. 밤하늘은 맑아서 별이 들여다보였다. 공주가 감성에 젖어 있는 동안 나와 봉이는 아이돌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었다. 누군가 자꾸 불꽃을 쏘아올렸고 나는 조금 취했다. 신나고, 졸리고... 밤의 협재 바다는 말 그대로 눈부셨다. 수평선을 따라 고기잡이배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전날 택시에서 봤던 건데 또 봐도 좋았다. 이런 빛이라면 평생 보고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 여름을 이 하루에>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제목에서 따왔다. 걸작이니 읽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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