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당연히 잘 지내지요

아무도 묻지 않아서 혼자 하는 대답들

1.

나? 나는 늘 외롭지, 어느 때는 서럽게 외롭고 어느 때는 담담하게 외롭지. 남자친구가 있어 좋은 구석이 있고 친구들이 있어 좋은 구석이 있고, 그런데 어떤 구석은 뭘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외로워도 울고 슬퍼도 울겠지만 그것도 다 내 것이니까. 못나고 외로워도 내 것이니까 나는 괜찮아.


2.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자신만큼 끔찍하게 미운 건 없다. 신문사 낡은 소파에 드러누워 이달의 소녀 웹드라마나 보다가, 그런 내 자신에게 진저리를 치면서 컵라면을 하나 들고 미술관을 찾았다. 새벽 세 시. 거기서는 친구가 밤을 새워 과제를 하고 있었다. 실기실에는 꽃 그림, 물 그림, 죽은 새 그림, 친구는 흰 조각상을 그리고 있었다. 미술관 낡은 소파에 드러누워 그림 그리는 친구를 구경하다가, 어차피 아무 것도 안 할 거면 굳이 여기 올 필요 없이 신문사에 그대로 있었어도, 아니 그럴 게 아니라 그냥 기숙사 가서 잠을 자면 될 것을 이 새벽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생각하다가, 아 혹시 이게 그 젊음이라는 거 아닐까, 한심하고 지루하고 고단하고, 눈물겹고.


3.

머리를 짧게 잘랐다. 숏컷 같은 단발이거나 단발 같은 숏컷이거나 암튼 그 정도 길이다. 고개를 숙여 국물을 떠먹을 때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턱 언저리를 향한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국물에 빠지지 않게 받치려고. 뒤통수는 동그란 초코송이 같다. 머리를 자르기 직전에 남자친구에게 한예리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말했었는데 그게 실수였다. 남자친구는 아직까지도 나만 보면 한예리라고 부른다. 자랑하는 게 아니고 한예리 팬으로서 진짜 민망해서 죽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나도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알아! 헤어스타일이 같다고 다 같은 게 아냐! 그래도 걔는 계속 우기고, 사랑의 힘은 참 위대하다 싶고, 앗 쓰다 보니까 역시 자랑 맞나.


4.

몇 달 만에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를 찾았다. 꽃을 바치며 피해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어리다. 정말 어리구나... 참사가 있었을 때 내가 그들보다 한 살 어렸기 때문인지 난 그들이 어리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4년이 지나고 들여다본 이들의 얼굴은 그저 말갛고 해사했다. 나는 어른이 되었는데 이들은 아직도. 이 어린 아기들이, 이 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이 부조리를 이해하는 날이, 이곳 분향소에서 울지 않는 날이 올지 나는 모른다. 그 날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라며 리본을 또 한 움큼 집어 왔다.


5.

불꽃을 보러 갔다. 백만 명이 모인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불꽃놀이 그거 보자고 백만 명이 모인다고? 싶었는데 노량진 사육신공원에 도착하고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껏 사온 돗자리를 펼 한 평 땅이 없었다. 벤치에도 잔디밭에도 흙바닥에도 사람 사람 사람.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연예인이 오는 것도 오로라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고 기껏 불꽃놀이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빨간 불꽃은 리튬이고 노란 불꽃은 소듐이겠지. 아님 말고... 암튼 이게 그렇게 대단한가? 또 나는 왜 여기에 있나? 그리고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나는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팠고, 펑펑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게 돈이 얼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대기오염이 심각하게 걱정되었고, 이게 다 대기업 한화의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자본주의 돼지들! 그리고 문제의 불꽃은 정말 더럽게 요란하고 시끄럽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전부터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찬란한 저녁 하늘도 내리는 벚꽃 비도 핵폭발 같은 불꽃도. 모든 것이 끔찍한데 이들은 어쩌자고 이렇게 대책 없이 천진한가? 왜 도무지 절약을 모르고 퍼붓듯이 아름다운가? 아무런 쓸모도 없으면서 왜 세상에 나타났고, 왜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지는가? 번번이 속고 상처 입고 지치면서도 사람들은 끝없이 예쁜 것들을 찾아 헤맨다. 젊음을 집어삼키고 학대하는 노량진 하늘에 꽃이 피자 사람들은 맥주를 사들고 몰려들었다. 포성을 내며 불꽃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하이라이트에 다다르자 불꽃은 폭발하는 천 개의 태양 같았다. 멸망 같았고 꿈 같았다. 나는 행복했고 슬펐고 묻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은 왜 아름다울까? 누가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불렀을까? 그 사람은 얼마나 슬펐을까?

6.

굶주린 것처럼 책을 읽고 있다. 지금은 이문영의 <웅크린 말들>을 읽는다. 자주 숨이 턱턱 막힌다. 말해지지 못한 말들. 말이 되지 못하고 사라지는 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내뱉는 말들, 특권이라는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아무 영양가 없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사라지는 말들을. 한때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이 하고 싶었다. 지금은 단정하고 단단한 말, 힘과 예의를 가진 말이 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입은, 나의 글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되려 다른 이의 입을 막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양지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