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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삶과 사랑을 욕망한 여성의 운명

내 방에는 아직도 초등학교 때 선물받은 ‘어린이를 위한 세계명작’ 전집이 있다. 어떤 분량의 대작이든 (심지어 ‘장 크리스토프’와 ‘전쟁과 평화’까지) 전부 200페이지로 거칠게 요약한 뒤 ‘논술 쑥쑥! 생각해 보기’ 같은 코너로 마무리하는 촌스러운 전집이지만, 그래도 이 전집은 나의 유년기 독서 경험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고, 비록 빈약하지만 나의 문학적 지식 함양에도 큰 공헌을 했다. (완역본은 아직 한 줄도 안 읽어 봤는데 내가 어떻게 ‘전쟁과 평화’ 주인공 이름이 나타샤라는 걸 알았겠어?) 특히 드레스를 입고 마차를 타고 다니던 책 속의 여성들은 그대로 내 마음 속에 들어와서 그 이후 줄곧 나와 함께 살았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몸을 튼튼히 해서 죽지 않으면 됩니다”라고 대답하는 어린 제인 에어의 사나운 눈빛, 폭풍우 치는 밤 창문을 두드리며 “들여보내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캐서린 언쇼의 절망적인 눈빛, 한 걸음씩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테스 더버필드의 어두운 우물 같은 눈빛과, 사랑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냐고 애원하는 연인에게 조용히 “성스러움”이라고 대답하는 알리사의 광기 어린 눈빛이 번득이고 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변변치 못한 남자를 지나치게 사랑한 결과 팔자가 기구해지고 말았고,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꼬꼬마 페미니스트로 성장하면서도 이들의 삶이 어떤 의미로 아름답다는 생각은 지우지 못했다.

헤스터 프린 역시 그런 식으로 내 안에서 살았다. 가슴에는 불타는 A자를 수놓고, 갓난아기를 안은 채 처형대에 서 있는 헤스터의 모습은 감수성 풍부한 소녀 독자가 아니라도 쉽게 잊기 어려운 장면이다. 어린 나의 눈에 로저 칠링워스는 싸이코였고 아서 딤즈데일은 얼간이였고, 이 둘을 때려죽이고 유럽으로 망명하지 않는 헤스터는 바보였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부분은 늙은 헤스터가 아기 옷을 바느질하는 장면이었다. 펄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직도 이 결말은 독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펄은 그렇지 않아!

아무튼 그  ‘주홍 글씨’를 다시 읽었다. 그동안 번역이 달라졌는지  ‘주홍 글자’로 제목이 바뀌어 있었다. 글씨든 글자든, 완역본으로 다시 읽은 책은 정말 끔찍하고 아름답고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무엇이 끔찍하냐면 헤스터의 삶이. 또 무엇이 아름답냐면 그것도 역시 헤스터의 삶이.

여자의 몸으로 감히 삶을 원하고 사랑을 원한 죄로 헤스터는 치욕의 증표를 달고 군중 앞에 선다. 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죄의식은 존재했고, 그것이 숙명이 되어 그의 삶을 지배한다. 딸 펄이 “나도 어른이 되면 저절로 가슴에 글씨가 생기는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헤스터는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얘야, 어서 가서 햇빛을 잡아! 금세 사라지겠구나.”

펄은 엄마의 말을 듣고 정말로 햇빛을 잡으러 달려갔다. 펄은 휘황한 빛에 둘러싸여 깔깔거리고, 빛은 펄의 근처를 머물며 아른거린다. 그러나 헤스터가 햇빛을 잡으러 다가간 순간 빛은 사라진다. 햇빛에 닿을 자격이 없는 삶, 햇빛도 부끄러워 피하는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간다고 그는 믿는다. 그는 딸 펄만이라도 ‘어서 햇빛을 잡기를’ 바라지만, 딸의 존재 역시 죄의 결과라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에 침몰하지 않고, 그를 지배한 청교도적 윤리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를 저버린 세상을 저버리지 않고, 결국 죄의 징표를 승리의 징표로 다시 창조해낸다. 수치와 징벌로써 주어진 주홍 글씨는 선과 악의 경계, 도덕과 삶의 사각지대에서 빛을 비추고 병자를 인도한다. 낡은 신념이 내린 징벌을 묵묵히 완수함으로써, 욕망과 분노와 사랑을 끝내 멈추지 않음으로써 그는 그 신념을 전복하고 무력화한다.

“마을 전체의 일이든 개인의 일이든, 재난이 닥치면 사회에서 버림받은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재빨리 찾아냈다. 마치 그 집안의 침울한 어스름이 그녀에게 이웃과 교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매개물 같았다. 그곳에서는 수놓은 주홍 글자가 이 세상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빛으로 위로하듯 반짝거렸다. 다른 곳이었다면 죄악의 징표였을 그 글자가 병자의 방에서는 양초 구실을 했다. 병자가 괴로워하는 마지막 순간에 주홍 글자는 시간의 경계를 가르며 어렴풋한 빛을 던졌다. 이승의 빛은 빠르게 저물어 가고 저승의 빛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 순간, 주홍 글자는 병자에게 발 디딜 곳을 보여 주었다.”

두 남성 로저 칠링워스와 아서 딤즈데일, 그리고 잔혹한 청교도 사회의 가해 속에서 헤스터는 순정한 희생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분노와 원망(여성에게는 금지된), 그리고 사색(여성에게 더더욱 금지된)을 통해 ‘주홍 글자의 낙인보다 더한 죽을죄로 간주했을’ 사상을 남몰래 키워나간다. 이 사상을 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족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암울한 의문이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곤 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 해도, 과연 여성으로서의 삶은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것일까? (...) 우선은 사회의 전 구조가 뒤집히고 새로 건설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여성이 공평하고 적절하다고 할 만한 지위를 떠맡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남성의 천성 자체나 대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천성에 가까워진 습성이 본질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난관을 제거했더라도 여성 스스로가 훨씬 크게 변모하지 않는다면 이런 앞선 개혁을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가장 참회해야 할 죄라고 여기는 것은 그자가 손을 지그시 잡으면 내키지 않는데도 같이 맞잡아 주고, 그자가 미소를 지으면 눈과 입술에 미소를 떠올리며 그의 미소에 녹아들었던 일이다. 그리고 로저 칠링워스가 저지른 일들 중 가장 악랄한 죄는 그녀의 분별력이 모자라던 그때, 그녀로 하여금 그의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게 만든 점인 것 같았다.”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던 딤즈데일 목사는 결국 스스로 처형대 위에 선다. 그것을 마지막 양심과 용기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비겁한 도망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다. 삶의 의미를 목사에 대한 복수로 삼았던 로저 칠링워스 역시 목표가 사라지자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가장 오래, 가장 모욕적인 자리에 서 있었던 헤스터는 삶의 편에 남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겸손하게 남을 돌보는 마음으로, 딸을 키우고 또 떠나보내면서.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을 버린 곳으로 돌아온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그를 평생 괴롭히고 멸시한 곳에서 헤스터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속죄를 완성하고, 이로써 주홍 글자를 통해 그를 낙인 찍고자 했던 ‘경건한’ 사회는 거꾸로 속되고 잔인한 곳임이 증명된다.

그의 삶을 ‘성녀’로 볼 수도 있고, 속죄 서사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내게 헤스터 프린은 영웅이고, 저항가이고, 불타는 듯 고통스럽고 끝없이 슬프고 슬픈 삶을 끝까지 살아낸 한 인간이다. 내 안에서 살아 있는 헤스터의 눈빛은 칼날처럼 곧고 강한 눈빛, 종교와 윤리의 그늘에서 서슬퍼렇게 빛을 발하는 눈빛이다. 로저 칠링워스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고 자신을 탓하는 딤즈데일 목사에게 헤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날 용서해야 해요!” 헤스터가 낙엽 위로 쓰러지며 소리쳤다. “벌은 하느님께 맡겨요! 당신은 용서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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