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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지난 주였던가 지지난 주였던가, 서울에 하얗게 첫눈이 온 그날 나와 남자친구가 사는 청주에도 눈이 왔다고 한다. 눈을 보고 감상적인 기분이 된 남자친구는 내게 "부대입니다. 전화주세요" 문자를 보냈지만 나는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지도 첫눈을 보지도 못했다. 자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 내렸다는 첫눈은 순식간에 녹았고 오후에야 일어난 내 눈에는 젖은 땅만이 보일 뿐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첫눈 이후로는 다시 비만 내렸다. 바로 그저께도 차가운 비가 내렸고, 나는 축축하고 어두운 기숙사 옥상에서 남자친구와 전화로 대판 싸우고 엉엉 울었다. 싸움의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공감과 소통방식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고, 사회적 시스템의 신뢰도 문제 때문이기도 했고, 그냥 페레로로쉐 하나 때문이기도 했다. 초콜릿 하나 가지고 그렇게 서러울 일인가? 그 날이 생리 첫날이고 시험기간이고 날씨가 우중충하다면 그렇게 서러울 수 있다. 몇몇 군필자들이 자신을 군대에 보낸 국가 대신 여자들을 원망하는 것처럼, 그날에는 나도 국가 대신 남자친구를 실컷 원망했다.

이틀이 지나고 남자친구와 어정쩡하게 화해를 한 뒤 나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몇 주 전에 분홍색 양주를 선물받았는데,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마시고 있다가 오늘 드디어 날을 잡은 거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기숙사 입사생이었으므로 오붓하게 술을 마실 공간 같은 건 없었다. 양주를 들고 처량하게 학교를 헤매던 우리는 결국 미술관으로 숨어들었다. 여기서 미술관은 '아트 갤러리'가 아니라 미술교육과 학생들이 퀭한 눈으로 밤새 과제를 하는 건물을 말한다. 심란하고 난해한 유화가 가득한 실기실에서 우리는 양주를 마셨다. (물론 미술관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 미술교육과 학생이 아니라면 더더욱 안 된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이 얘기를 소문내면 안 된다.)

양주는 예뻤고 맛있었지만 턱없이 모자랐다. 내게 양주를 선물한 사람, 그러니까 또 남자친구는 내 주량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도수가 낮은 술을 골랐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려가 무색하게도 우리는 소주와 컵라면을 더 사왔고 결국 신나게 취하고 말았다. 취한 사람에게 미술 실기실만큼 신나는 곳은 없다. 나는 쓰레기통에서 가짜 꽃을 꺼내 바닥에 뿌리면서 돌아다녔고 친구1은 가짜 가지를 꺼내 붕붕 휘두르다가 부러뜨렸다. 유일하게 수치심이라는 걸 아는 친구2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아 먼저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나와 친구1은 한참 더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불건전한 얘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먼저 일어난 친구2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새벽 5시였다. 춥고 어지러웠다.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오자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청주에는 두 번째 눈이었고 나에게는 첫눈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이렇게 눈이 내리는 새벽이면 혼자 휴게실에 나와서(나는 고등학교 때도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땐 오히려 지금보다 성숙했고 '센치'했던 것 같다. 하지만 술이 덜 깬 스물한 살(한 달 있으면 스물두 살)의 나는 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깔깔 웃으면서 마구 뛰어다녔다. 취하면 원래 기분이 좋은데 눈까지 내리니까 너무 신나서 죽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새벽이었고, 바로 몇 시간 뒤에 시험이 있었고, 비싼 양주를 깡소주처럼 털어 마셨고, 그 양주를 선물한 남자친구와는 별 같잖은 이유로 싸웠고, 쓰레기통에서 플라스틱 꽃을 주워 흥청망청 뿌렸고, 눈의 여왕의 벌떼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상해서 너무너무 신이 났다. 추웠고 어지러웠고 행복했다. 나도 남자친구에게 "학교입니다. 전화주세요" 이런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도. 그리고 참 고맙다고도. 하지만 새벽이었고 남자친구는 아직도 내 화가 덜 풀렸나 걱정하면서 자고 있을 것이었다.

살금살금 방에 들어왔는데 룸메는 안 자고 있었다. 맞다 시험기간이지. 그제서야 조금 죄책감 비슷한 게 들었지만 금방 털어버렸다. 목도리를 풀어 의자에 걸쳐 놓다가 바닥에서 뭔가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몇 주 전에 잃어버린 커플링이었다. 술이 확 깼다. 내가 이걸 얼마나 찾았는데!

나와 남자친구는 결국 서로의 첫눈을 놓쳤고 나는 페레로로쉐를 내 돈 주고 세븐일레븐에서 사먹었지만, 그래도 반지를 찾았으니 적어도 한 가지는 괜찮은 셈이다. 어쩌다보니 사건이 그럴싸하게 진행돼서 이렇게 글도 하나 쓰게 됐으니 이것도 괜찮은 일이다.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괜찮은 일들을 기억해서 꼭꼭 모아 두려고 한다. 괜찮지 않을 언젠가를 위해서. 눈이 왔고, 이제 겨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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