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일 오후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간다. 가장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클래식FM을 들으면서 책을 읽는다. 고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 현실은 자전거 타느라 피곤함 + 점심 먹은 후의 포만감 + 소파와 클래식의 편안함 때문에 꾸벅꾸벅 졸기 바쁘다. 주인공이 우주를 바쁘게 탐험하는 책을 읽다 살짝 잠들면 방금까지 읽던 책의 내용이 꿈에 섞여 들어간다. 그러다 퍼뜩 깨어나면 아까 듣던 음악이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채로 여전히 흐르고 있고, 방금 본 외계인이 책에서 나온 건지 꿈에서 나온 건지 헷갈리게 된다. 그렇게 반은 꿈 속에서, 반은 글자들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읽은 책이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이었다.


2.

대학 면접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흥분하지 말라는 거였다. 톡 튀어나와 반박하지 말라고. 너는 선생님을 만드는 학교에 지원했고 그런 학교는 보통 말 잘하고 자기 주장 뚜렷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고. 너는 선생보다 투사에 어울린다고. 비아냥이 섞인 말이었지만 나는 칭찬으로 들었다. 교육서의 고전이라며 수십 번 번역되어 나온 루소의 <에밀>을 신나게 욕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낡았다. 낡았어. 300년도 더 전의 책을 왜 빨고 있는 거지. 교사야말로 가장 영민하고 눈을 반짝 뜨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선생들의 말에 열심히 딴지를 걸고 비웃었고 아마 그들은 내가 졸업한다는 게 기쁠 거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런 약간 삐딱한 교육관을 가진 내게 이 책의 첫 장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물론 킵은 완전히 이상적인 학생이지. 머리가 비상하고 학구열이 높고 겸손한데다 배우는 태도도 좋다. 루소의 에밀처럼. 교사가 될 사람이 학생을 떠올릴 때 킵이나 에밀을 떠올린다면 아마 무척 힘들어질 거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똑똑한 아이들도 현실에 존재하고, 이 책의 첫부분은 그런 똑똑한 아이들(모두 알겠지만 이 땅의 교육은 느린 아이들뿐 아니라 특출난 아이들에게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과 그럭저럭 공부에 관심을 가진 평범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상당히 흥미롭고 (나에게는) 꿈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목표를 정한 후 배울 과목과 학습 과정을 스스로 선택하며 주도적으로 하는 공부. 말로 하니까 너무 쉽고 표면적이고 헛소리 같네. 이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앞으로 한참 더 가야 한다. 그러니까 투사 같다는 말은 나한테 칭찬이다.


(그리고 원래 책 속의 주인공이 "이것저것 배웠다"라고 나열하는 서술을 좋아한다.<황금 물고기>의 라일라가 "이런이런 책을 읽었다"하는 부분도 좋아하고.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데 현실은 이 블로그 하나 쓰는 것도 미루고 미루고 있지)


3.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겠지만 나도 영화나 소설 속에 오누이가 등장하면 "으..." 하게 된다. 속 깊고 의젓한 오빠와 해맑고 순진한 여동생. 너는 예쁜 여동생을 뒀으니 곧 그 여동생을 지키려다 죽거나 크게 다치게 되겠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이 좋았던 부분이 바로 그거다. 물론 킵과 피위는 오누이가 아니지만, 나이 많은 소년과 어린 소녀라는 점에서 "오빠가 지켜줄게! 쾅 탕 으윽..! 어서 도망가 바보야!" 같은 게 나올 확률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하지만 킵과 피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최강의 콤비이자 좋은 친구이다. 물론 킵은 피위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건 자기보다 어리고 약한 상대를 지키는 것일 뿐, 그리고 킵이 피위를 돕는 만큼 피위도 킵을 지키고 구원한다. 피위는 유능하고 아무도 그 유능함을 기특함 정도로 끌어내리지 않아. 최고다.


4.

인간 캐릭터는 전부(킵과 피위뿐 아니라 킵 아빠,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외계인 쫄따구 두 놈까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고 캐릭터가 뚜렷한 반면 외계인들의 묘사는 표면적인 데 그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엄마생물을 비롯한 베가인들과 우주해적은 너무 전형적인 선악구도로 그려져 있었고 둘 중 어느 쪽에서도 별 감흥(애정이든 경멸이든)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생물이 특히 아쉬웠다. 엄마생물이라는 이름부터 사실 좀 구린데 계속 그 설정에 머무르고 말아버린 느낌. 후반부에 엄마생물이 조금 강경한 모습을 보일 때 나는 조금 흥분했고 거기서 더 나아갔으면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끝까지 따뜻 다정한 외계인으로 남아버렸고 많이 싱거워졌다. 게다가 베가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부터가 꽤 힘이 들어서 더 모호한 캐릭터로 남아버린 것 같다.


5.

매년 지구멸망 루머가 돌 때마다 "올해는 제발 좀...!" 하는데 정작 이 책의 후반부의 재판 장면에서는 괜히 인류과 지구를 대표하는 사람인 양 가슴이 두근두근해졌다. 이런 영웅 이야기는 인류 탄생 이후로 계에에속 있어왔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거지. 거기다 최근에 본 로그원까지 더해져서 "아이고 여자로 태어나서 데스 스타 설계도도 못 훔쳐보고 우주 재판에서 지구 변호도 못 해보고 무료하다.."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지구 변호를 한다면 "동식물은 안됩니다...! 인간은 타죽든 얼어죽든 마음대로 하시되 펭귄과 렛서팬더와 고양이는 지켜주세요!!!!" 할 것 같지만.



양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