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 들어온 책 목록을 보니 아마도 우리동네 도서관에 SF 덕후가 있는 모양이다. 그분 덕분에 요즘 내가 호강하고 있다. 코니 윌리스 걸작선 1권 <화재감시원>을 읽고, 2권 <여왕마저도>를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어서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짠 하고 신간 서가에 나타난 것이다. 코니 윌리스 책은 지금까지 딱 네 권 읽었는데 그 정신없고 수선스럽고 시끄럽고 어처구니없는 분위기 너무 좋다. 더 열심히 일해라 장덕도서관...


2.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둠즈데이 북>에서도 그렇지만, 코니 윌리스의 세계가 크리스마스와 만나면 한층 더 시끄럽고 정신없어진다. 외계인, 그것도 지구인이 하는 모든 행동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외계인이 떼로 등장하고, 그 외계인보다 더 답답하고 지긋지긋한 인간들도 쉬지 않고 귀찮게 하지만, 그래도 내게 이 중편은 따뜻하고 설레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였다. 결국 이 모든 소란과 혼란이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캐롤 합창으로 모이고 화해하는 것. 물론 노래가 끝나자마자 이 사람들은 또 미치고 팔짝 뛸 만큼 고집스럽게 자기 말만 늘어놓겠지만, 어쨌든 지금만큼은 우리 모두 함께 모여 노래 부르고 있잖아. 당신과 나는 사랑에 빠졌고, 외계인들도 찌푸린 인상을 풀고 나랑 악수하잖아. 그럼 된 거야. 크리스마스잖아.


하지만 내가 훈훈한 엔딩보다는 거기까지 가는 우당탕탕 대소동을 다 좋아한다는 건 부인을 못하겠다. 지구인들이 음악을 틀어주고 성경을 읽어주고 향기를 내뿜는 동안 부루퉁하게 서 있는 외계인이라니 이런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너무 웃기잖아.


3. 여왕마저도

이야기의 초반에는 퍼디타의 사이클리스트 활동이 일종의 페미니즘 운동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올라, 트레이시, 할머니 같은 '명예남성'이 그걸 말리려는 줄 알았지.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혼란스럽더니 나중에는 "퍼디타 정신차려! 그건 아니야!" 하고 있었다. 생리는 이제 엄마가 될 수 있음(또는 이제 완연한 여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소중한 것도 아니고 자연의 신비한 주기를 함께 겪는 것도 아니고(이런 말을 하는 책을 조금 봤는데 다 남자 작가들이었다) 생리대 광고에 나오는 산뜻 상쾌한 것도 아니다. 생리는 아주 좆같고 그 누구도(특히 남자들) 그 좆같음을 부정할 순 없어. 우리는 앞으로도 더 시끄럽게 생리가 좆같다고 떠들고 다닐것이다. 물론 그전에 회피장치가 나오면 더 좋겠지만...


4. 마블아치에 부는 바람
어느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무너져간다는 걸 깨닫는 것에 대한 이야기. 좋았던 것, 반짝였던 것들은 전부 망가져 버렸고 앞으로도 다 사라지기만 할 거야. 하지만 내게는 아직 당신이 있고 당신을 사랑해. 결국 모든 것이 폐허가 된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은 당신을 사랑해. 이런 마음이 확 몰려와서 케이오 되고 말았다. 정말, 좋았던 것들은 왜 다 손에서 미끄러지고 마는 걸까. 좋았다는 것도 모른 채로 그렇게. 언젠가 세면대 앞에서 허리를 접고 변기 물을 몇 번이나 내리면서 꺽꺽 운 뒤로 나는 나이에 안 어울리는 과도하게 향수에 젖은 감성을 가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다 어디 갔지, 그 나뭇잎, 그 나비, 그 순진한 미소들은 다 어디 가고 지금은 이딴 것밖에 안 남았지, 하면서 울었던 그날 저녁.

5. 마지막 위네바고
이건 슬펐다. 분위기는 <클리어리 가족이 보낸 편지>와 비슷한데 별 이유도 없이 정말 슬펐다. 역시 모든 것이 서서히 무너지고 멸종해가는 세상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가는데 모든 등장인물이 안쓰럽고 처연하고 그랬다. 특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화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졌다.내가 이 소설에서 멜로를 읽어낸 것도 그 외로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들이 사라지고, 캠핑카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데 당신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해.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당신을 지킬 수 있을까.


6.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단편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네. 하여튼 이 책은 대체로 1편인 <화재감시원>보다 더 차분하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알라딘 책소개에서 '애상과 애정의 진자운동'이라는 말을 보고 무릎을 탁.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따뜻하고 다정한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들. 단 그 사랑의 대상에서 생리는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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