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유빈 감독의 영화 '셔틀콕'은 마음 약한 관객이라면 여러 번 보기 힘든 영화다. 관객을 인정사정없이 인물 속으로 끌여들여 감정의 부침을 함께 겪으며 시달리게 한 뒤, 다시 무책임하게 스크린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영화. 이 영화를 두 번 보고 난 후 나는 길에서 보드 타는 남자애들만 봐도 마음이 아파버리는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으나, 어쨌거나 나는 배우 이주승의 팬이었으므로 한 번 더 볼 수밖에 없었다. 거듭해서 볼 수록 느껴지는 감정의 진폭이 커졌고, 결국 이렇게 거의 물리적인 통증을 느끼면서 리뷰를 쓰는 중이다. 세 번째로 본 셔틀콕은 한 마디로 짜증날 정도로 아픈 영화다. 나도 민재처럼 무언가에게 화를 내고 싶지만, 역시 민재처럼, 화를 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셔틀콕은 이런 영화다. 모든 상황이 믿을 수 없게 잔인하고 막막하고 짜증나지만 결국 그것을 다 안고 가야 하는 소년의 이야기.


2.

민재는 열일곱 살이다(영화 내에서 민재의 나이는 언급되지 않는다. 열일곱이라는 숫자는 영화 보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혼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그 보험금으로 잘 살아 보나 했는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누나가 보험금을 몽땅 들고 날라 버렸다. 역시 피 한 방울 안 섞인 어린 남동생만 남겨 놓고. 민재는 어렵게 얻은 정보를 가지고 누나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고생 끝에 찾아낸 누나는 임신을 했고, 돈은 다 써 버렸고, 민재의 속마음, 차마 말하지도 못하고 조용히 커져버린 첫사랑은 '그냥 존나 착각'이 되고 말았다. 짐덩어리인 동생은 자기 뒤만 졸졸 쫓아다니고 심지어 성소수자인 것 같다. 한 마디로 엿 같은 상황이다. 영화는 오버하지 않고 지나치게 친절하지도 않게 민재의 이런 상황들을 차근차근 비춰 준다. 영화 내내 민재는 뚱한 표정이다. 늘 어딘가에 화가 나 있는, 불만이라기보다는 불안에 가득 찬 표정. 눈빛은 흔들리고, 말투는 필사적으로 센 척하고, 발걸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지만 서투르기만 하다. 툭 건들면 무너져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한 소년. 소년이 그리는 비틀거리며 헤매는 궤적. 마치, 셔틀콕의 비행처럼.


3.

민재의 첫사랑은 유난히 고되다. 긴 생머리에, 눈부시게 예쁘고, 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자기랑만 놀려고 하는 누나. 게다가 그 누나가 은근하게 언질을 주는 것 같으니 민재의 마음은 무턱대고 부풀어오를 수밖에. 하지만 민재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반항밖에 없는 애송이였고,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간지럽고 쪽팔려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고, 결국 민재는 바보 같은 말로 누나를 도망치게 만든다. 영화 내내 민재는 '내 돈 떼간 년 잡아올테다' 태도로 일관하지만 속마음이 그게 아닌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민재에게 첫사랑은 온통 깜깜한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엇, 생각만 해도 속에서 뭔가 이상한 것, 울렁거리는 것이 치밀어오르는 그것, 분명 내 마음인데도 내 의지대로 되지 않고 바람에 마구 날려다니고 혼자서는 연습도 할 수 없는 셔틀콕 같은 것이었다. 민재는 이미 한 번의 기회를 놓쳤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첫사랑을 잡아 보고 싶었다. 그럼 뭐가 됐든 다 잘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누나는 '다 너의 착각'이라는 말만 던지고 떠나버린다. 민재는 또 한심하게 기형아나 낳아버리라는 폭언을 퍼붓고 돌아선다. 그날 밤 술에 취해서 '시발 쪽팔려 죽겠다'며 발을 동동 구르며 울어버리던 그 목소리. 필사적으로 두르고 있던 어른의 껍데기가 깨어지고 빨갛게 생채기가 난 속살이 드러나는 순간, 이 아이가 얼마나 어린지 실감이 나면서 관객들 마음도 같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4.

이렇게, 혼자라도 충분히 힘들 상황인데 민재에게는 커다란 짐덩어리도 있다. 은주 동생 은호. 오줌싸개 은호, 되바라지게 톡톡 대드는 은호, 바지를 안 입으려고 하고, 화장을 하고 매니큐어를 바르는 은호. 민재는 몇 번이나 은호를 떼놓고 가려고 한다. 사실 기회도 무척 많았다. 은호만 없어도 어떻게든 그럭저럭 살아갈 만 할 것이다. 하지만 민재는 끝끝내 은호에게 돌아온다. 은호가 은주의 동생이라서?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어서? 다 맞는 말이겠지만, 나는 민재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이는 자신의 가족이고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 어딜 가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 마지막 장면, 결국 또다시 은호에게 돌아오고 마는 그때 민재의 어린 시절은 끝난다.


5.

어떤 평론가의 '아이에서 어른으로, 소년을 떠미는 여행'이라는 말이 아마 이 영화를 가장 장확하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민재는 한심하고 덜 자란 놈이고 별로 성장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민재를 어른의 세계로 떠민다. 운전을 하고, 술을 마시고, 노숙자로부터 자신과 동생을 지키면서 소년은 어쭙잖게 어른 흉내를 낸다. 서 있기도 힘든 바람 속에서 어린애까지 한 명 데리고 버티려면 어른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민재는 떠밀려 성장한다. 그렇게 호된 성장통을 겪고, 민재는 어떤 어른이 될까.


6.

나는 민재와 은호, 은주의 미래에 대해 별로 긍정적인 예측을 할 수가 없다. 그게 이 영화의 잔인한 점이다. 세 주인공의 앞날은 끝없이 막막하기만 하다. 못 미더운 남친과 알바에 의존하면서 은주는 아기를 잘 낳아 기르며 살 수 있을까. 성격도 더럽고 미성년자이기까지 한 민재는 이제 무슨 수로 살아갈까. 가진 거라고는 무책임한 형밖에 없는 은호는 이 세상에서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모르겠다. 끝없이 불안하다. 장밋빛 미래는 별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민재에게는 은호가 있다. 모든 게 무너지고 상실되는 이 영화에서 살아남는 건 이 문장뿐이다. 어쨌든 민재에게는 은호가 있다. 그리고 민재는 성질이 좀 더러울지언정 자기에게 주어진 몫은 견뎌낼 줄 아는 아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7.

민재가 머리를 자르던 날을 생각한다. 부모님이 계셨을 때, 은주가 옆에 있었을 때 민재의 머리는 이마를 덮는 긴 머리였다. 은주가 떠난 후 민재의 머리는 스포츠 머리라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 삐죽삐죽 짧아진다. 물론 그 이유는 배우 이주승이 전역한 지 이틀만에 촬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민재는 좀더 괜찮은 헤어스타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영화 외적인 이야기고, 나는 민재가 머리를 자르던 날의 장면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건 민재에게 일종의 셀프 성인식 같은 거였을 거다. 누나가 집을 나갔다. 이제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바보같이 당하지 않을 거다. 나는 어른이 될 거다. 되어야 한다. 그런 말은 되내이며 눈썹을 덮었던 긴 머리를 자르는 민재. 영화에 나오지도 않은 장면이지만 내게는 가장 아픈 장면이기도 하다. 원래 영화는 한 말보다는 하지 않은 말이 많고 그 부분은 관객들이 채워 나가는 거다.


8.

팬의 입으로 말하는게 얼마나 공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배우 이주승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 영화는 그의 얼굴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영화다. 셔틀콕에서의 이주승은 그의 전 필모를 통틀어서 가장 못생겼고, 무표정하고, 가장 예민하고 날 선 눈빛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이 영화의 모든 감정, 불안하고 긴장되고 막막하고 쪽팔리고 억울하고 설레고 그립고 절망하는 그 모든 감정은 그의 눈빛에서 나온다. 그는 그렇게 불친절한 소년 백민재를 관객들에게 이해시킨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가끔 과도한 컨셉 셀카를 인스타에 올리고 강아지를 좋아하고 수줍음이 많은 배우 이주승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거기에는 백민재만 있었다. 이주승이 이 영화를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영화로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게도 이 영화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작이다.


9.

이 영화의 포스터를 좋아한다. 미묘한 색채로 사람의 마음을 공명시키는. 내가 아직 이 영화의 줄거리도 뭣도 아무것도 모를 때도 이 포스터만 보면 마음이 짜르르하게 아팠다. 지금도 마찬가지. 분홍색 셔틀콕이 꽃잎처럼 날아다니는 메인 포스터도 그렇지만, 삼남매가 가을의 갈대밭을 말없이 걷는 포스터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무심하게 보기 힘들다. 특히 민재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며 따뜻하게 웃고 있는 사진(그렇다, 이 블로그의 프로필 사진)을 좋아한다. 영화 속의 민재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웃지 않는다. 포스터 속의 민재는 영화의 시간보다 한참 과거나 한참 미래의 민재일 것이다.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든 마음이 아프다. 영화가 그렇게 막막하게 끝나든 말든 자신의 시간을 걸어갈 민재. 비틀거리고, 흔들리면서도. 바람을 따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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