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긴 낮잠을 잤다. 꿈에 옷을 끔찍하게 못 입고 봉두난발을 했는데 잘생긴 남자가 나왔다. 일어나보니 눈이 펄펄 오고 있었고 나는 생각했다. C.B.가 나왔구나. 코니 윌리스의 <크로스토크>를 읽은 지 며칠이 지났을 때였고 나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다 잠든 참이었다. 눈앞의 앨리스가 아닌 며칠 전의 C.B.가 등장하다니 나는 이 책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아니면 그냥 C.B.를 좋아하거나.


2.

타고난 성격에 성장 환경까지 일조해서, 나는 '소통', '공감'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특히 나의 10대 후반은 '싫어 제발 나랑 소통하려 하지 마 혼자 있게 해줘 제발 제발'로 요약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가족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는 지금은 (하루종일 방에 처박혀 있기 때문에 가족과도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마주치지 않는다) 일생일대의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완벽한 남친'과 감정을 공유하는 EED 수술을 하겠다는 브리디의 결정이 처음부터 바보처럼 보일 수밖에. 하지 마 브리디. 미친 짓이야. 로맨스의 특성상 너의 '완벽한 남친'은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을 게 틀림없고 너는 아마 저기 지하실의 너드랑 사랑에 빠지게 될 거야. 하지만 역시 로맨스의 특성상 브리디는 가족과 C.B.의 만류도 뿌리치고 애인인 트렌트와 EED 수술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날 밤, 사랑하는 트렌트 대신 생각지도 못한 C.B.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거봐, 내가 뭐랬어.


3.

사실 브리디가 수술을 받기 전에도 이 소설은 이미 충분히 시끄럽다. 입 가볍고 성가신 직장 동료들과(나는 코니 윌리스가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는지, 있다면 동료들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지 항상 궁금하다) 조카를 과보호하는 언니, 남자 선택을 더럽게 못 하는 동생, 거기다 틈만 나면 '아일랜드의 딸들' 모임에 브리디를 참석시키려고 하는 고모(기억이 가물가물.. 고모님 맞겠지?)까지. 브리디가 빨리 트렌트와 결혼해서 가족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브리디가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그저 짜증나던 정도의 시끄러움은 공포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지, 악의, 천박함,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두 번째 얼굴. 더 많은 '소통'을 판매하는 회사 컴스팬에서 일하는 브리디는 인간의 끔찍하고 멍청한 (또는 끔찍하게 멍청한) 내면과 마주하게 되고,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남의 뇌에 구겨 넣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폭력인지도 알게 된다. 나는 마음속으로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C.B.가 구상중인 핸드폰이 어서 현실에도 발매되어주길 빌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목소리에 몸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는 브리디는 정말 정말 정말로 안쓰러웠다.


4.

하지만 브리디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나타나 구해주는 사람이 있다. 봉두난발 히키코모리 C.B.. 항상 브리디의 투덜거림을 묵묵히 듣고 가끔 깐죽거리기도 하다가 필요한 순간이면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간다!!!" 하고 달려오는 C.B.는 솔직히 멋있었고 나를 좀 많이 설레게 했지만 (왜 꿈에까지 나왔겠는가..) 동시에 너무 '로맨스 남주인공'이라서 좀 그렇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C.B.는 브리디를 참아주고 지켜주고 안내해 주는데, 물론 텔레파시 능력을 더 먼저 갖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이런 전개 너무 많이 봐왔다구요... 


5.

브리디와 C.B.가 함께 겪는 우당탕탕 스펙타클 시끌벅적 대소동은 여기서 요약하는 게 불가능할 뿐 아니라 별 의미도 없다. 900페이지 가까운 엄청난 분량이지만 한시도 지루하지 않고 정신 놓은 채로 끝까지 따라가게 한다. 수능 전에 빌린 책의 연체 때문에 대출을 할 수 없는 나는 며칠 동안 매일 눈바람을 뚫고 도서관으로 자전거를 굴려야 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방어벽', '대피소' 같은 정신적 공간을 물리적 공간처럼 표현한 것. 서로의 대피소로 놀러갈 수도 있고 문을 열면 물이 쏟아지고 라디오를 켜면 목소리가 들린다. 영화화된다면 특수효과를 많이 사용해야 할 것 같은. 굉장히 시각적으로 예쁜 영화가 될 것 같아서 잠시 기대했다가 이 책의 수다스러움을 떠올리고는 포기했다. 차라리 드라마로 나오면 재밌을 것 같기도.


6.

벌써 몇 번이나 쓴 말이지만 코니 윌리스 선생님 로맨스 정말 잘 쓰시고 내 머릿속에서는 그냥 멜로왕이시다.. 브리디랑 C.B.가 툭탁툭탁 할 때마다 진심으로 설렜고 둘이 키스하자마자 소설 끝난 거 정말 너무 얄미웠다. 메이브, 널 정말 좋아하지만 지금은 제발 가만 있어봐.. 저 둘이 900페이지만에 키스한다구....


이 사진 속 사람들 대체 누굴까 너무 브리디와 C.B. 그 자체이고 읽는 내내 그냥 이 사람들 대입해서 읽었다
이 사진 속 사람들 대체 누굴까 너무 브리디와 C.B. 그 자체이고 읽는 내내 그냥 이 사람들 대입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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