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곡은 항상 낯설다. 연극은 태어나서 딱 한 번 본 게 전부고 읽어본 희곡도 대부분 국어 모의고사에 나오는 것들. 수능 직전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을 읽기도 했지만 감동받기보다는 칼에 찔리고 나서 "오오, 칼에 찔렸구나!"라고 소리지르는 걸 재미있어하기만 했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를 처음 접한 것은 누구나 어릴 때 읽어봤을 '초등생을 위한 세계명작 시리즈'에서였다. 소설 형식으로 바뀐 셰익스피어의 명랑한 작품들을 난 참 좋아했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서는 4대 비극과 5대 희극을 찾아서 보기도 하고. 하지만 운율을 맞춰 가며 장광설을 읊는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며 읽기는 힘들었고 소설 형식으로 보는 게 더 재밌었다.


2.

오늘 읽은 <템페스트>도 마찬가지. 1막에서는 다짜고짜 남자들 대여섯 명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자기 할 말만 해대는데 그들을 구별하는 데 꽤 오래 걸렸다. 폭풍이 몰아치고 배가 흔들리는데 다들 갑판에서 웅성거리고, 수부장이 제발 좀 들어가 있으라고 하니까 험한 욕을 퍼붓고. 여기서부터 쭉 곤잘로가 싫었는데 마지막까지 '현명한 노대신' 대접 받는 것 마음에 안 들었고. 미랜더와 프로스페로가 등장하자마자 '이제 늙고 지혜로운 아버지와 아름답고 천사 같은 딸은 제발 그만 보고 싶다고!!!' 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기에 '멋진 사위(게다가 왕자)' 퍼디난드까지 합류하자 그저 한숨만.

 

여기까지는 그냥 불평하는 정도였다면, 캐러밴에 대해서는 좀더 정색하고 말해봐야 되는 것 아닐까. 캐러밴은 (정확하진 않지만) 장애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거기에 대해 모든 등장인물이 "이것 참 끔찍하군!" "이것도 사람인가?"의 태도로 일관한다. 게다가 우리의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원래 섬에 살고 있던 캐러밴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그걸 당연하고 옳은 일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방금 프로스페로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서 인터넷에 검색해봤다가 이 작품이 영국과 유럽의 식민지 지배를 풍자 또는 찬양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3.

셰익스피어는 꼭 이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그 유명한 샤일록에 대해서도 그가 정말로 유대인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당대의 유대인 혐오를 교묘하게 풍자한 건지 말이 많지 않은가. 말괄량이 길들이기도 마찬가지고. 나는 그냥 윌리엄 아저씨가 해맑게 유대인 혐오 여성혐오 하고 다닌 걸 후대에서 빨아주느라 해석이 복잡해진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그렇게 확신하기엔 '옳은 쪽'의 행동이 지나치게 가혹하고 뻔뻔해서... 모르겠네.


4.

내가 좋아한 부분은 이름부터 예쁜 에어리얼이 폴짝폴짝 다니면서 인간들 엿 먹이고 놀려줄 때. 그리고 트린큘로와 스테퍼노가 우스꽝스럽게 쿵짝쿵짝 하찮은 음모를 꾸밀 때. 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랑함과 시끌벅적함을 좋아해서. 에어리얼이 "주인님, 절 사랑하세요, 안 하세요?" 했을 때는 뜻밖에 귀여워서 웃고 말았지. (그리고 계속 '이것만 하면 너 풀어줄게' 하는 프로스페로는 꼭 악덕 고용주 같았다. 저사람 분명 최저시급도 안 줄거야...)


5.

읽는 내내 '흐음....' 했던 줄거리는 결말에 와서 더욱 혼란에 빠졌다. 아니 이러고 끝이야? 다 용서해? 정말? 저러고 둘이 결혼해? 아니 미란다, 지금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했어? 진짜 이게 끝이야? 이제 너네 집에 가는 거야? 용서 자체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문제는 용서 직전까지 두 사람은 살인을 꿈꾸고 있었고, 용서받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프로스페로에게 미안해하지 않았고, 프로스페로 자신도 방금 전까지 복수심에 불타 알론조, 안토니오, 세바스찬을 광기에 몰아넣었다는 거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냥 '갑자기 왜...?' 싶다. 나중에 읽어보면 또 다르려나.


6.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데서 프로스페로의 마지막 말과 행동은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힘이었던 마법 지팡이를 바다에 던져 버리고 관객들을 향해 박수를 요청하는 모습. 조금 찡하다가도 아니 그럼 자신을 멋지고 강력하고 마음 넓은 공작으로 표현했다는 거야...? 싶어 좀 웃기기도 하다. 대문호의 마지막 역작을 이렇게 얕게 읽고 떠들어도 되나 싶지만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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