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젯밤에 톰 포드 감독의 <싱글 맨>을 봤는데, 꾸벅꾸벅 졸면서 봐서(영화가 지루해서가 아니라 내가 졸려서였다) 기억에 남는 것도 별로 없고 제대로 감상한 것 같지도 않지만 20대에 본 모든 것을 기록하자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대충이나마 써본다. 비록 지금 밀린 리뷰도 한두 개가 아니지만...


2.

또 지긋지긋한 하루를 견뎌야 하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꿈을 꾸다 일어난 조지는 거울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가슴이 미어져내린다. 가라앉고 있는 것 같다. 거울 속의 내 모습에선 얼굴은 보이지 않고 곤경에 빠졌다는 인상만 느껴질 뿐이다. 조지는 솔직하다.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관객은 그가 8개월 전 애인의 죽음을 겪었고 그로 인해 끔찍하게 괴로워하고 있으며 오늘 자살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 그의 애인은 그보다 어리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는 것, 그들이 개를 키웠다는 것, 애인이 죽은 뒤 그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는 것도 모두 알게 된다. 조지에게는 의미심장한 나레이션이나 복잡한 편집으로 관객을 헷갈리게 할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너졌기 때문이다. 짐의 죽음과 함께 그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더이상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 헉슬리에 대한 강의를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절망을 감출 힘도 없이 부서져 있다. 이 영화는 (포스터의 문구와는 달리) 잘생긴 콜린 퍼스의 격정 멜로가 아니라 그 눈빛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생을 끝내기로 결심한 사람의 마지막 하루.


3.

조지의 마지막 하루에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친구 찰리와 제자 케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대학 교수가 수업 끝나고 찰리랑 놀고 그 다음에는 케니랑 놀고 그러다 심장마비로 죽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지는 찰리랑도 케니랑도 최선을 다해 노는데 그 두 사람은 많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찰리는 젊은 시절에 조지랑 잠깐 잤지만 이제 친구로 남은 여자다. 리처드를 사랑했지만 그는 떠나 버렸고 자식들은 연락이 없다. 조지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찰리는 좀 과도한 화장을 하고 공들여 머리 손질을 하고 직접 요리도 한다. 누가 봐도 조지랑 자고 싶은 것 같지만 대신 같이 춤을 추고 옛날 얘기를 한다. 찰리에게서는 지독한 외로움의 냄새가 난다. 이제 아무것도 없어. 왜 아무것도 없지. 왜 너는 게이인 거야. 찰리의 섬세한 머리 모양이 점점 흐트러질 때마다 애써 감춰둔 질문들이 삐져나왔고 조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케니는 조지의 수업을 받는 젊고 잘생긴 제자다. 그 젊음과 잘생김을 무기로 그는 당돌하게 조지에게 작업을 걸고 조지도 전혀 튕기지 않는다. 결국 술에 취해 기분이 잔뜩 좋아진 그들은 한밤중에 홀딱 벗고 바다에 뛰어들게 된다. 달빛이 검은 바닷물과 둘의 젖은 몸을 비춘다. 음악도 없고, 색채도 없고(톰 포드 감독은 구찌의 유명 디자이너이고 영화는 독특한 색채와 이미지로 가득하다), 두 사람의 즐거운 웃음소리만 들리는데,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인데, 나는 왜 슬펐는지 모르겠네.


4.

바다 수영을 마친 둘은 조지의 집으로 들어가고, 이때쯤 내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그 뒤로 내 머릿속에는 '왜 둘이 섹스 안하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음란해서가 아니라 그때 둘의 분위기가 그랬다. 조지는 케니를 보면서 처음으로 진심 같은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섹스신을 볼 수도 있었을 거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사랑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결말을 볼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15세 관람가로 개봉하고 마는데 그 이유는 조지가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게 뭐야, 내가 충격에 빠지든 말든 영화는 깔끔하게 끝나 버린다. 게다가 죽은 조지가 나레이션도 한다. 빠르게 혹은 천천히, 올 것은 오고야 만다. 그리고 정해진 그대로 그것은 온다. 심지어 이건 조지가 아침에 일어나면서 한 말이기도 하다. 난 그런 생각도 했다. 조지는 자기가 오늘 죽을 걸 알고 있었나? 그래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살을 결심...? 설마. 


이 글을 마치고 빨리 자려면 여기에 내가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아야 하겠는데, 사실 지금도 손에 딱 잡히는 답은 알 수가 없다. 내가 좀 덜 졸고 집중해서 봤다면 달랐을까. 설마.


내가 아는 한 이 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웃음이 되어 터져 나올 때까지 하루하루 무심하게 세월은 흐르고,
그렇게 위안을 얻은 그들은 결국 감기에 걸려 죽었다.


쉼보르스카의 시 <사진첩>의 일부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조지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사는 건 멜로드라마 같지 않아서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기도 한다. 그럼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닐까. 짐, 찰리, 케니와의 시간들은 아무 소용없는 게 되는 걸까. 조지에게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조지가 죽음의 순간에 떠올리는 이미지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모습이다. 그날 아침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짐의 꿈을 꿨다. 8개월 동안, 조지는 짐이 가라앉는 모습을, 얼마나 추웠을지 고통스러웠을지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상상했을 것이다. 드디어 답을 알게 된 조지는 행복했을까. 빠르게 혹은 천천히, 올 것은 오고야 만다. 그리고 정해진 그대로 그것은 온다. 죽어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5.

가장 열심히 안 본 영환데 가장 열심히 리뷰를 쓴 이유가 대체 뭐지. 세상에 정말 열심히 썼네... 


6.

콜린 퍼스와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그저 감탄스럽다. 그리고 니콜라스 홀트는 너무 아름답네.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고 강렬한 느낌의 소년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때 그 워보이가 아니야...

세상에 국내 포스터 정말 못 만들었네...
세상에 국내 포스터 정말 못 만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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