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희준의 <깊은 바다 속 파랑>은 2016년 sf어워드에서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데 sf어워즈 자체가 심사위원에 뜬금없는 광고계 인사가 끼어 있는 등 한마디로 '엉망'이었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상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대상감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이건 책을 다 읽은 뒤 알게 된 사실이고, 처음에 이 책을 집어든 결정적 계기는 저자의 이름이 노희준이라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 영화 <셔틀콕> 리뷰에서 밝혔다시피 나는 배우 이주승의 열렬한 팬이고, 노희준은 영화 <장례식의 멤버>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의 이름이다. 그리고 영화 속 희준은 자신을 둘러싼 어떤 기묘한 가족에 대한 소설을 완성시킨 뒤 홀연히 자살하는 의문의 소년이다.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노희준이라는 이름이 붙은 소설을 발견했을 때, 당연하게 빌려올 수밖에.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소설은 가상의 소년 희준이 죽기 전에 썼을 법한 소설과 뜻밖에도 꽤 닮았다.


2.

읽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몇 시간 만에 후루룩 한 번 읽고,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일주일 동안 내버려 두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결국 한 번 더 읽었다.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소설이다. 아, 이런 소설이구나, 하는 순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몸을 틀어 간다. sf의 틀을 쓰고 있지만 어느 장르에도 들어맞지 않고 부유한다. 인물들은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엇갈리고 흔들린다. 독자는 불쾌하다가 문득 매혹당한다. 이 들쑥날쑥함은 소설 속 파랑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깜박이는 연약한 빛으로 바닷속의 어둠과 싸우고 굴복하고 끝내 그 어둠을 끌어안고 사랑하며, 비틀비틀 나아가는 인류의 마지막 잠수함. 또는 심해어 루시의 이야기.


3.

멀지 않은 미래, 전지구적으로 핵을 이용한 테러가 발생해 인류의 대부분이 전멸한다. 살아남은 건 마침 심해의 잠수정에 있던 노인 피셔, 정부의 조사관 셀린, 군인 이삭. 이중에 테러리스트 조직 '앨리스'의 일원이 있을 수 있다. 세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의심하고 대립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아슬아슬한 공생을 이어간다.


줄거리에서 예상되는 치열한 두뇌 게임은 찾을 수 없다. 테러조직 앨리스의 정체도 (이름이 왜 앨리스인지도) 끝내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석유가 사라지고 핵잠수함이 자원을 채굴하는, 극단적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진 근미래에 대한 서술도 쉽게 손에 잡히지 않고 느슨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세 사람의 이야기다. 피셔가 사랑한 물고기 루시, 셀린이 거미소녀로 불리며 클럽을 배회했던 이유, 성녀처럼 아름답고 온화하던 이삭의 어머니. 다시는 잠수함을 나갈 수 없다는 절망, 임무를 내릴 정부가 사라졌지만 임무를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뜻밖에 찾아온 사랑. 그 사랑이 몰고 온 생소하고 강렬한 감정들. 먼저 떠난 동료를 향한 그리움.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 어쩌면 마지막 인류일 수도 있는 그들이 매달린 것은 싸우고 후회하고 고민하는 평범한 관계였다.


가능하다면 셀린과 함께 돌고래로 태어나고 싶었다.

잘 알 테니까 셀린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할 필요 없겠고.

옆 동네 애들이나 듣게 나는 셀린이 있어 행복하다고 초음파로 외치면서, 그렇게.


4.

문제는 내가 세 주인공 중 누구에게도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소설을 읽을 때 지루한 줄거리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인물의 매력 없음인데, 그렇게 공들여 그려 냈음에도 내게 세 사람은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피셔는 지금까지 소설에서 수도 없이 등장했던 과묵하고 지혜롭고 인간을 기피하는 노인이었고 (후에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까지 완벽했다) 셀린 역시 낯설지 않았다. 이삭은 익숙한 걸 넘어 불쾌한 인간인데, 초반에 자기보다 상관인 셀린에게 '누나', '아가씨'라고 부른 게 큰 역할을 했다. 아가씨 소리 집어치워 제발.


여기서 이 소설의 애매한 구석이 더 드러난다. "이 장편은 sf이면서 동시에 젠더에 관한 소설이다"라고 작가의 말에는 쓰여 있는데, 그 말을 믿어야 할지는 의심스럽다. 소설 속 유일한 여성인 셀린은 피셔와 이삭처럼 독립적인 인간이 아닌 두 남성의 욕망과 사랑, 또는 질투의 대상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여성'의 행동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망(=아기)을 생산할 위대한 모성의 화신이 된다. 테러로 인해 사망한 두 여성 대원도 각각 '비너스'와 '어머니이자 누이'로 그려진다. 다만 작가도 셀린의 위치를 인식하는 듯 '나는 하나의 자궁일 뿐인가?' 하는 고민을 드러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민의 해결 방법은 피셔와 이삭 모두와 자는 것이다. 남자와 자지 않고도 여자는 인간이라는 게 아직도 설명이 필요한 얘기인가. 페미니즘을 잘못 먹고 체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하다.


5.

대부분의 순간 이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하네" 하고 덮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이 소설은 들쭉날쭉하고 보폭이 넓다. 뭐야 sf가 아니었어? 하는 순간 익숙한 sf의 근미래 사회와 맞닥뜨린다. 감정 이입이 안 된다고 불평하려던 순간 절절하고 설득력 있는 감정 묘사가 튀어나온다. 심해생물과 잠수정과 어뢰에 대해 딱딱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별안간 아름다운 문장에서 눈이 멈춘다. 책 중간중간에 삽입된 (좀 유치한) 글자로 만든 물고기 모양과 (역시 좀 안 어울리는) 연필 삽화도 기묘한 분위기를 더한다. 이 불균형이 의도된 건지 작가의 역량 문제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자꾸 시선이 쏠리는 건 분명하다. 매력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거친 이음새. 우연인지 이 표현은 피셔와 이삭이 셀린을 묘사한 말과 흡사하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이상한 소설.


6.

언제까지 바다속에서 평화롭게 살 수만은 없다. 셀린의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생겨난 그 순간, 모두가 죽음을 꿈꾸게 된다. 그리고 삶을 놓으려던 그들의 눈앞에 환한 별떼가 쏟아진다. 먼 옛날 피셔가 살려 준 물고기 루시. 그 거대한 빛은 너무 대놓고 희망이고 미래여서 나는 오히려 팍 식고 말았네. 희망 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나. 나도 <로그 원> 리뷰에서 구구절절 희망 얘기를 했었는데.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나타난 눈부신 빛...! 그것은 희망...! 하는 건 너무 닳은 수법 아닌가요. 게다가 생존자들까지 등장하다니.


7.

다시, 이 소설과는 아무 상관 없는 영화 속 소년 희준이에게 돌아가 보자. 그는 깊은 바다 속 파랑함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홀리고 다니는 이상한 소년이다. 그는 죽기 전 소설을 쓴다. 자신이 사랑했고 자신을 사랑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 가족이면서 동떨어진 궤도를 도는 그들을 위해 소년은 소설 속에서 그들을 재창조해 다시 만나게 하고, 소설은 곧 현실과 겹쳐지며 낯선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고 이 장편 <깊은 바다 속 파랑>의 작가 노희준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쓴다.


소설의 결말을 쓸 무렵에 아버지는 병원에 계셨다.


내가 원래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말을 썼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이 든 남자의 편을 들고 있었다. 피셔와 하여금 아버지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하고 있었다. (중략) 새로 쓴 결말을 보며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작품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연결된다. 내가 진부하다고 투덜거린 결말은 사실 아버지의 병을 지켜보는 아들의 절실한 희망이었다. 작가의 아버지는 바다의 파수꾼 피셔가 되어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작가 노희준은 가상의 소년 노희준과 만난다. 소년 역시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자신은 볼 수 없을 희망을 그렸다. 장례식장에서 난데없이 만나 자기들의 입맛이 닮았을을 깨닫는 가족. 마지막 순간 온 우주의 별처럼 빛나는 루시. 아 정말 모르겠다. 난 이 책을 별로 재미없게 읽었고 추천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그냥 싫어해버릴 수도 없네. 아무리 진부한 빛도 빛은 빛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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