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머리 위로 비정상적으로 큰 보름달이 휘청이고, 색색의 천막이 늘어선 골목들은 네 개, 여덟 개, 열여섯 개로 증식하고, 아코디언 소리, 이국의 음식 냄새, 고대의 장신구와 동물 가죽, 허리띠를 두른 여자들. 기억을 팔아서 얻은 물고기 비늘이 손 안에서 부스러지고, 웰컴 투 김성중 월드, 하는 소리를 들은 건 착각이겠지. 어떤 작가의 세계에 이렇게 매혹당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아 세상엔 재밌는 소설이 너무 많고 저는 너무 애송이입니다..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들을 때 나는 약간 뜬금없는 부분에서 마음이 덜컹 하고 멈추는데, 여기서는 이 문장이었다. 다음 만월이 되면 나는 로나를 만나러 갈 것이다. 로나. 팔에 세 개의 눈금을 가진 사람. 죽음을 생각하던 그때의 기억을 물고기 비늘과 바꾸고, 그 비늘을 다시 팔찌와 바꿔서 절망의 눈금을 가리던 사람. 슬픈 기억을 모두 팔아버린 뒤에도 그는 끝내 국경시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기억을 팔아서 그곳의 상인이 된 로나. 영문을 모르는 흰 눈빛. 국경시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로나만이 아니다. 주코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에 뛰어들었다가 물고기에게 뜯어먹힌다. 남자는 마지막 순간에 탈출하지만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무엇이 그들을 죽였나. 아니 죽은 건 정말 그들일까. 기억을 잃은 로나가 정말 그전의 로나일까.


읽으면서 나라면 무슨 기억을 팔 것인가, 고민했는데 어떤 기억도 팔고 싶지 않다는 결론이 나와서 스스로도 좀 놀랐다. 나쁜 기억은 수도 없이 많다. 잊을 만 하면 우르르 몰려와 나를 울리거나, 화를 내게 하거나, 미친 듯이 이불킥을 하게 한다.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나를 좀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그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나일까. 결국 못나고 추한 기억이 모여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하나라도 잃게 된다면 나는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것 같았다...라고 낮에 썼는데, 밤에 다시 생각해보니 자아 따위가 뭐라고 기억을 팔아치울 기회를 내팽겨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자기혐오도 심하면서 좀 무너지면 어떻대.. 행복하면 그만이지.


세 주인공이 시장의 유혹에 이끌려 파멸로 걸어들어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는 항상 내가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 적의를 품는다. 그들은 내 약점의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주인공을 싫어하게 되었는데 그가 나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팔아버릴 수 있다면. 나를 버릴 수 있다면. 그 대가로 세상 모든 쾌락을 가질 수 있다면... 솔깃하지 않은가.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행복한(?) 선택을 한 이들의 끝이 전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다 사고 즐겁게 쇼핑을 마무리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잃고 시장에 흡수당하거나(로나), 끝내 욕망에 사로잡혀 죽음을 맞거나(주코, 중국 옷을 입은 남자), 겨우 탈출하고 나서도 달의 계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주인공). 좀 우울해 보이긴 해도 멀쩡하던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추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그리는 추락의 곡선은 갈수록 가팔라진다. 처음에는 추억을 담은 가면을 위해 기억을 팔았던 주인공은, 다음에는 음식을 잔뜩 시켜 딱 한 입씩 먹기 위해, 창녀의 이름을 알기 위해 점점 더 많은 기억을 펑펑 날리게 된다. 아픈 기억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행복이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그저 텅 비어 갈 뿐이었고 허전해진 영혼은 눈앞의 쾌락에 아무 저항 없이 끌려갔어. 물고기는 열다섯 살이 되지 않은 소년만이 잡을 수 있어. 내가 국경시장에 간다면 주코와 같은 꼴이 될 것 같다. 닥치는 대로 책을 사모으다가 시간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나쁘지 않은 결말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나는 이 소설과 좀 잘 맞는 것 같다)


쿠문

벌레에게 물리면 천재가 된다, 여기서 이미 나는 "오 됐습니다 no벌레 no천재" 하고 도망칠 것 같은데, 심지어 그 '천재병'에 걸리면 수 년 내로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게 된다. 이런 병을 누가 걸리려고 할까. 놀랍게도 천재병 '쿠문'을 선물(?)하는 류에게는 지원자가 끊임없이 찾아온다. 류의 재능과 야망과 죽음을 지켜본 주인공도 끝내는 짧고 고통스러운 천재의 삶을 택한다. 눈부신 빛이, 거기 있었다...라고 그는 쓴다.


그에게 천재가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인생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질투였다. 빛나는 재능을 가진 동생을 질투하다 결국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재능을 갖지 못한 이상 영원히 스스로를 고문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몸을 갉아먹으며 뒤덮는 건 벌레가 아니라 그의 오랜 욕망이었을 것이다. 이유도 형체도 없이 그를 쥐고 흔들던, 고통스럽게 하고, 숨쉬게 하던 주인 없는 욕망. 그는 눈부신 빛이라고 썼지만 나는 거기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신은 재능을 얻어도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왜냐면 그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당신이 딛고 선 땅은 뿌리 깊은 자기혐오와 피해의식과 열등감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바닥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진짜 평안을 얻을 수는 없을 거야. 당신은 빛을 보았다고 했지만, 당신이 정말 본 건 당신의 맨얼굴이야. 차마 오래 쳐다보고 있을 수 없을걸.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건 누구에게 한 말이지.


관념 잼

저기, 우리의 주인공이 걸어오고 있다. 노낙경 씨. 지극히 혐오하는 대상, 다른 말로는 '영혼의 정수'가 없는 사람. 다른 소설 속 이혼남처럼 그 역시 불행하고 공허하고, 회사에서 잘리고 퇴직금의 절반은 친구가 들고 날랐다. 그럴 때 다른 주인공들은 술을 진창 마시고 여자를 두들겨 패거나 여자랑 자고 나서(둘 다 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장황한 독백을 한바탕 늘어놓고 자살하던데, 낙경 씨는 지방에 내려가 집을 장만한다. 신경 써서 가구를 고르고, 가구에 어울리는 물건을 사서 예쁘게 배치하고. 고분고분한 사물들과 꾸려가는 마이 스위트 홈. 이쯤 되면 꽤 훌륭한 편 아닐까. 비록 영혼의 정수는 좀 없어도 착하고 무해한 사람 같은데. 하지만 작가는 그가 소소한 행복을 누리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완전한 통제 아래 있다고 생각하던 사물들이 그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것.


짧은 악몽 같은 소설. 낙경 씨는 사물에 배신당하고 농락당하다가 끝내는 사물의 위치로까지 내려앉고 마는데, 작가는 물론 소설 안의 그 누구도(낙경 씨 본인마저도) 그를 별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책, 천장에 붙어버린 문손잡이, 밥솥과 냉장고가 전투를 벌이는 거실에서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것만이 낙경 씨를 '사물'과 구분해 주기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이면서도 별 의식 없이 사물 같은 삶을 살던 낙경 씨는, 모든 자유를 잃고 곰 인형 모양 병 속의 일종의 '관념 잼'이 되고서야 스스로를 찾게 된다. 이 과정이 무슨 관념소설처럼 펼쳐지고 게다가 작가까지 끊임없이 끼어들고 떠들어대서, 마지막 페이지까지도 아 좀 어려운 소설이구나 싶었다. 낙경 씨의 방에 비가 내릴 때까지는. 사실 나는 아직도 이 소설의 결말을 잘 이해 못 했는데, 그 아름답고 불길한 분위기는 내가 뭐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읽어보시는 게 낫겠다.


낙경씨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 큰 나무들이 둘러선 가운데 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덟 마리의 사냥개들이 달을 향해 컹컹 짖었다. 달빛이 방안을 비추자 유리로 된 손에서 금으로 된 손톱이 자라기 시작했다. 죽은 성자의 유골함이 된 느낌이었다. 섬뜩하고도 성스러운 공기가 병 안에서 팽챙하게 부풀어올랐다.


달은 점점 높게 떠오르면서 가장자리가 떨어져나갔다. 달이 번식한다. 밤하늘에 여러 겹의 원이 샹겨났고 원을 따라 달의 개수도 늘어났다. 환월은 달 사냥개의 숫자와 같아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것의 제자리를 다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바와 아그네스

한국의 공항에서 두 사람이 만난다. 184cm의 전직 모델, 교통사고로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백인 에바와, 지구에서 가장 참혹한 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던 한국 출신 입양아 아그네스. 화려한 런웨이와 지뢰가 묻혀있는 난민캠프, 모델과 사진가, 큰 키와 작은 키, 백인과 동양인. 맞춘 듯이 정반대인 그들이지만 삶의 여러 모퉁이에서 그들은 만나고, 그들의 사이는 멀어지고 가까워지며 점점 단단해진다. 그들의 발자국이 겹쳐진 순간들을 따라가 보자. 느리게, 뒷걸음질로. 모든 것의 처음, 외톨이 소녀들의 어두운 눈과 옅은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으로.


가장 마법의 농도가 낮은 단편. 달이 쪼개지고 나무가 피아노를 치지 않는 세계에서, 두 친구는 마법보다 더 무서운 현실의 맨얼굴을 마주보며 살아간다. '재난의 스펙터클'이 되어 대중 앞에 전시당하는 것, 또는 끔찍한 재난을 대중에게 보이지 못하고 사막의 모래 속에 묻어 버리는 것. 화려하고 냉담한 런웨이, 또는 알라가이라의 죽은 몸. 에바와 아그네스는 일어서고 주저앉으며 눈앞의 희망과 불행을 조용히 마주해 나가는데, 그 담담한 모습이 난 왜 슬펐는지.


두 사람이 걷게 될 경로를 알고 있어. 다음에 어떤 골목으로 들어서는지. 거기서 무엇을 맞닥뜨리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은 예상보다 더 고통스러우리라는 것. 그들도 이미 알고 있을 사실이 왜 이렇게 슬펐을까. 카메라의 이편과 저편에서, 바로 자기 발밑의 눈앞만 보며 걸어가는 두 주인공의 발걸음을 거꾸로 따라가 마침내 거울 속에서 어색한 눈빛이 응고되던 그 순간, 왜 그 모든 고통스러운 미래에서 도망쳐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는지. 왜 그 순간 안에 영원히 웅크려 쉬고 싶었는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순간인데. 생각해보니 굳이 거꾸로 걷지 않아도 늘 그렇지 않은가. 가장 오래된 기억, 공기의 울림과 냄새와 뭉개진 색깔로만 이루어진 그 희미한 순간이 삶의 마지막 풍경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항상 품고 있었다는 걸 이 단편을 읽고서야 자각했다. 이걸 간단히 말하면 '사는 거 고단해'가 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니고...


....

여기까지가 절반이다. 이 리뷰를 쓰는 데 엄청나게 오래 걸렸고, 지금도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매혹과 불길함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모든 단편에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라고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으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실패한 것 같다. 이것도 김성중 소설 같지 않은가. 애매한 감정을 올바르게 설명한 단어를 찾으려 애를 썼지만 그냥 구질구질한 자기소개나 하고... 그런데 아직도 써야 할 게 반이나 남아 있고... 김성중 소설의 공식대로라면 나는 끝내 리뷰를 완성하지 못하고 단어의 숲에서 영영 길을 잃겠지. 리뷰 나그네에게 행운을 빌어 줘요.

양지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