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속에서는 빛도 일렁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 창백한 수영장 바닥에 빛으로 된 커튼이 춤을 추며 드리워지고. 직선의 레인을 따라가며 헐떡이던 소년이 돌연 방향을 바꾼다. 잠수. 빛 속에서 유영하는 소년의 몸짓에서 환희와 몰입이 전해진다. 이 햇빛이 먼 우주에서 왔다고 생각하면 신기해요. 그리고 호루라기 소리. 야 이새끼야 너 뭐해! 물에서 나온 소년은 집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멍이 들도록 맞는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 이야기다.


2.

<4등>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영화 프로젝트로 제작된 영화다. 말만 들었을 때는 "우리 모두 소중한 인권을 지켜봐요!!*^^*" 하는 영화일 것 같지만 안 그렇다. 이 프로젝트는 벌써 몇년째 (과연 정부가 진행하는 게 맞나 싶을만큼)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고, 4등 역시 때리지 마세요! 나빠요! 하는 민숭민숭한 영화가 결코 아니다. (여담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도 ebs 통일기획 청소년 드라마다. 청소년, 인권 같은 말이 붙은 창작물에 편견을 버려!)


준호의 코치 광수를 보자. 그의 과거 행동은 '좀 맞아야 말을 듣지'의 정석이다. 머리 좋고 재능 있는 애가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도망쳐 도박이나 하면서 뺀질거리는 상황. 아무리 화를 내도 반성은 커녕 느물거린다. 그를 보면 누구라도 "아오 저걸 그냥 확" 할 것이고, 특히 한국인이라면 "저런 애는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을 것이다. '사랑의 회초리'를 관광지에서 파는 나라니까.


그리고 광수는 정말로 코치에게 폭력을 당한다. 광수는 알고 지내던 기자 영훈(준호의 아빠)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은 말, "맞을 만 하니까 맞았지"를 듣는다. 광수는 결국 수영을 그만두고 완전히 엇나가게 된다. 그리고 훗날 준호에게 똑같은 폭력을 휘두른다. "때리고 혼내는 선생님이 진짜 너를 생각해주는 거다, 나중에 고마워하게 될 거다. 내가 겪어보니 그렇더라." 라고 말하면서. 맞다. 광수가 그때 묵묵히 맞고 수영을 계속했다면 그는 선수로서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이다. 체벌의 역겨운 논리가 그에게는 완전히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16년 후 비슷한 상황에 처한 준호 역시 체벌을 견디지 못하고 수영을 그만둬 버린다. '맞아야 실력이 늘고 철이 드는 거다'라는 익숙한 논리는 결국 두 번이나 실패로 끝나고, 폭력의 고리는 아래로 아래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어떤 순결한 피해자를 두고 "때리지 마세요 흑흑" 이게 아니라 "아무리 애가 잘못을 했고 내 안의 한국인이 '저러면 좀 맞아야 되는데...' 하더라도 때리는 건 일단 나쁘고 효과도 없다 이놈들아" 하는 것. 그래, 이상하잖아. 애초에 광수를 때리지 않았으면 수영을 그만뒀겠냐고. 때리면서 "널 위해서야" 같은 게 어딨어.


3.

그리고 그 "맞으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피해자인 준호 입에서 직접 나온다는 것도 좋다. 준호는 누군가 도와줘야 하는 가련한 피해자가 아니다. 자기 의사를 직접 표현하고, 위축되어 있지만 미안해하지는 않음. 왜냐면 잘못한 게 없으니까. 처음에는 "내가 집중 안해서 맞은거야.." 하던 아이가 단호하게 "맞고 싶지 않습니다." 할때 좀 울컥했다. 누구도 그 어떤 이유로도 아이를 때릴 순 없어. 폭력에 변명은 없어.


4.

지금까지 아동폭력 얘기만 했는데 그만큼 중요하게 다룬 주제가 바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 이 주제로 영화 소설 드라마 265849개 봤는데 이렇게 안 촌스럽고 아름답게 그린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직선의 레인을 넘어 자신의 빛을 따라 유영하는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강렬한 메시지가 된다. 그래, 생각해 보면. 수영은 재밌는 건데, 그걸 얼마나 빨리 하는지 시간을 재서 3등까지는 메달을 주고 4등부터는 엄마한테 "너 인생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어?"라는 소리를 듣게 하자는 생각을 누가 처음 한 걸까. 언제부터 우리는 조금 더 빨리 결승선에 들어오자고 다른 소중한 것들을 다 길에 놓고 달리게 된 걸까. 늘해랑이라는 동아리가 있었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하는 곳. 성격 좋고 생각 깊은, 열정이 반짝반짝 빛나는 애들이었어. 기숙사 휴게실에서 밤을 새우던 그 대화들. 하지만 그애들은 교대에 가지 못했어. 대학에서 너는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니? 보다 너는 내신이 몇 등급이니? 를 먼저 물어봤거든.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크게 불만 갖지 않았는데, 그게 정말 맞는 거였을까? 정말 그렇게 중요했을까?


5.

결국 준호는 간섭과 폭력 없이 혼자 수영하는 편을 택한다. 엄마는 모든 관심을 동생에게로 돌려 버리고, 광수는 과거의 행동을 반성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호를 응원하기로 한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하지만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그 대회에서 준호는 당당히 1등을 한다.


여기서 조금 당황했다..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했던 얘기가 다 뭐가 되는 거지...  왜 1등만 강요해! 등수가 중요한 게 아냐! 하는 영화 아니었나. 마지막에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게다가 연출도 애매하게 해놔서 설마 준호의 환상인가?!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설마.


그전에 내장탕집에서 준호가 한 말이 중요한 것이다. "(전에는 1등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하지만 이젠 1등하고 싶어요. 그래야 좋아하는 수영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계속 한국에 살아야 한다. 준호가 수영의 즐거움을 되찾고 엄마와 광수의 그늘에서 자유로워지고, 계속 4등을 한다, 그렇게 되면 물론 아무 문제 없는 결말이지만(난 그렇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설득하고자 하는 류의 사람들에게는 "거봐 내가 뭐랬어~" 따위의 반응만 얻을 것이다. 하지만 준호는 보란듯이 1등을 한다. 그동안 맞고 욕설을 들으면서도 4등, 잘해야 2등 하던 아이가 자기 방식대로 연습하자 정말로 실력이 향상되었다는 것. 경쟁 대신 즐기면서 수영(아니면 뭐든)하는 게 비단 인권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효과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도 좋게 하고 싶지, 근데 현실이~~" 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물론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준호가 4등을 하고 6등을 해도 "재밌으니까 괜찮아!!" 하고 모두가 "그래그래!!" 하고 응원해주는 영화가 나와야 한다. <4등>은 그런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간절한 노크 같은 영화다.


6.

<4등>에서 가장 빛났던 건 배우들의 연기. 준호, 광수, 준호아빠, 준호동생... 하다못해 은평구 체육센터에서 일하는 아저씨까지 아무도 오버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특히 준호 엄마... 이항나 배우는 이 역할로 어떤 상이든 받았어야 했다.


인물들 얘기를 한명씩 해보자. 일단 나는 준호랑 인호가 너무 좋았는데, 왜냐면 정말 아무데나 있는 애들이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의 천사 같고 조숙한 아이는 없다. 준호는 연습보다 노는 게 좋고, 내심 메달도 따고 싶고, 동생이랑 싸우고 엄마한테 거짓말도 (치밀하게) 하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초딩이고 유재상 배우는 그 연기를 정말로 잘 해낸다. 수영도 너무 잘해서 아역배우인지 수영선수인지 계속 궁금했는데 배우이자 선수라고... 와 너는 둘 중에 뭘 해도 크게 되겠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렴 응원할게...


그리고 준호엄마는 정말 호러였다... 자아가 없고 모든 것을 자식에게 쏟아붓고 있는 사람. 자신의 '희생'에 도취되어 자식에게도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 나의 욕심, 나의 체면을 자식을 위한 것으로 착각하고 폭력과 모욕을 서슴지 않는 사람. 그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너무 무섭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준호 아빠도 싫었는데, 준호 엄마가 '뭘 하면서' 괴롭힌다면 준호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겉보기에는 좋은 사람으로 남는다. 아내가 아들과 고생하는 동안 전혀 관심도 없었고 돕지도 않았으면서 일이 생기자 엄마만 탓하고 아들에게 좋은 아빠 대접을 받는다. 남의 아들(과거의 광수)은 맞아도 되고 내 아들은 안 된다는 태도는 말이 인 되고, 애초에 "맞을만 하니까 맞았다"는 말로 광수의 사고방식을 바꿔버린 것도 준호아빠. (그전에 광수는 자기가 맞은 게 부당하단 걸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준호엄마와 광수는 나름의 성찰의 기회?를 얻는데 광수아빠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굿 빠덜~로 남아서 아쉬웠다. 영화 자체가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은 느낌.


그리고 광수. 가장 직접적인 가해자이고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너무 싫은 인물인데, 그렇게 싫어지지가 않았다. 광수가 과거의 피해자여서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이 캐릭터가 ~아 싫어하든가~ 말든가~ 니 맘대로 하시고 이리 와서 한잔해~ 이런 헐렁한 구석이 있어서인 것 같다. 박해준 배우는 광수를 '남모를 아픔을 가진 멋진 상남자' 따위로 표현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고 그 점이 광수를 호감으로 만든 느낌. 준호가 수영장 가운데로 도망쳤을때 너이샛기 이리나와!! 이리 안나와하!!!??? 하고 삑사리 내면서 방방 뛰는 거 너무 웃겼다구. 막 멋있게 분노하지 않아.. 하찮게 발만 구를 뿐..


7.

<4등>은 작고 힘있는 영화다. 올바른 메시지를 뚜렷하게, 깊게, 그리고 아름답게 전달하는. 흔한 공익광고 같은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일단 한 번 보시길.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이런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결코 진부해질 수 없다는 것을.

저 이 포스터 집에 있어요(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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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우 표정 너무 완벽하다 연기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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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상 배우. 눈여겨 봐두세요. 크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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