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행하게 오래 만나자

대학에 입학하고 3개월 동안 여기에 글을 통 못 썼는데 처음 한 달은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였고 나머지 두 달은 너무 재밌어서였다. 정말로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그토록 바라던 명랑한 삶을 사는 중이고 가끔은 그런 내가 낯설다. 이제 내게 우울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가끔 기분이 센치할 때 즐기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반짝임은 영원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으며 어느 순간 다시 눈물만이 남으리라는 것, 다시 바닥 없는 물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리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제인은 말한다. "이건 내 생각인데 난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 부터 불행이 시작되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쭈욱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이런 개 같이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그래서 같이 사는 거야." 영화관에서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지금 내 옆에서 이 영화를 같이 보고 있는 나의 친구들을 생각했다. 난 지금까지 '이런 개 같이 불행한 인생 되도록 혼자 살아야지' 주의였는데, 지금 나는 그 지긋지긋한 불행의 틈에서 반짝, '있을까 말까'한 순간을 이 사람들이랑 같이 보내고 있구나. 그리고 언젠가-반드시- 이 행복이 저물고 익숙한 불행이 다시 내 옆자리를 차지해도, 어쩌면 그때도 이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겠구나. 이런 개 같이 불행한 인생, 중얼거리면서. 그거, 나쁘지 않겠다. 제인의 말처럼.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친구들이랑 같이 봤다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써 놓긴 했지만 사실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은 혼자 보는 게 훨씬 좋은 영화다. 제인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있을까 말까 한 행복'보다는 '개 같은 불행'에 더 집중하는 우울하고 잔인하고 때론 아주 끔찍한 영화. 한창 힘들었던 열아홉 살 때 이 영화를 봤으면 분명 울면서 n차를 찍었을 거다. 어떤 우울은 닮은 우울함으로만 위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거의 모든 종류의 우울함이 비벼져 있어서 웬만한 사람들은 다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 내 경우에는 주인공 '소현'이 너무 나 같아서 싫고 짜증났고 급기야 소현의 표정 하나하나가 끔찍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민지 배우의 섬세한 연기력에 박수를.


소현

소현 이야기를 더 해보자. 소현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화자인데, 주인공으로도 화자로도 영 못 미덥기만 하다. 소현은 우리에게 각기 다른 내용의 편지를 두 번 보내오는데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아니 진실이 있긴 한 건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시간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조각을 관객에게 툭툭 던져 놓는데 이 조각들이 대체 어떻게 해도 맞지가 않는다. 아 이게 이런 순서로군! 하면 또 어디서 이상한 구석이 튀어나오고. 이주영 배우가 연기한 '지수'는 소현과 아는 사이였다가 모르는 사이였다가 죽었다가 살았다가 하고. 전반부에서 상냥한 '쉼터 쌤'이었던 배우는 후반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뉴월드 마담을 연기한다. 결국 사실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영원히 맞출 수 없는 퍼즐인 셈이다. 관객이 "아니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라고 절규하든 말든 자기 할 말만 느릿하게 하고 가 버리는 답답한 아이.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한심한 아이. 그래서 모두가 싫어하고, 모두에게 버림받고, 부치지도 않을 편지를 오래오래 쓰는 아이. "방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 방법을 모르겠어"라며 울어 버리는 그 표정이 나랑 너무 닮아서 나는 질겁해버렸다. "저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꿈만 같던 시간들은 다 사라져 버렸어요.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고, 누구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그때로 돌아갔습니다." 제인을 만나, 또 지수를 만나 소현은 있을 곳을 찾는 듯 했으나 늘 끝내는 외톨이로 돌아가 버린다. 정호 오빠를 잃고 제인을 잃고 지수를 잃고 팸에서 버려지고 소현은 달린다. 그렇게 끈질기게 불행했으면서 아직도 불행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로. 왜 모든 게 이렇게 됐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 끝까지 알 수 없고 끝까지 억울하고 슬픈 얼굴로. 이상한 말이지만 그 한결같은 얼굴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 내가 그렇지 뭐, 이렇게 불행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이기적이고 뻔뻔해서. 앞으로도 소현이 가라앉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나와 다시 만났으면. 똑같은 불행한 얼굴로. 그러면 나도 인사해줄텐데. "안녕? 돌아왔구나."


제인

"안녕? 돌아왔구나." 제인이 등장하면 영화의 색깔이 달라진다. 소현도 편안해지고, 제인팸 식구들도 편해지고, 관객들도 안심하고, 어쩐지 영화 자체도 제인을 기다리는 인상을 받았다. 뻔뻔한 제인, 아름다운 제인.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특별한 위로와 기댈 곳을 주는 제인. 하지만 그렇다고 제인이 안정되고 성숙한 사람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섭식장애가 있어 등에 앙상하게 뼈가 드러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걸 알고 눈물을 흘리며 "휘파람 불어 줘"라고 말하는 제인은 누가 봐도 불안하고 불행한 사람이고, 결국 자신의 불행에 침몰하고 만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제인을 사랑하고 기댔을까. 왜 제인을 엄마라고 불렀을까.

초콜릿을 나눠 먹기 싫어서 혼자 나가서 양볼이 터져라 집어넣는 소현에게 들으라는 듯 제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케익이 3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여기서 '더불어 사는 삶' 같은 공익광고 같은 얘기를 꺼내면 웃기겠지만 제인이 하려는 말은 정말로 그거다. 개 같이 불행한 인생 우리 같이 살자. 시시해지지 말고. 반짝반짝 미러볼도 훔치고, 알록달록 탱탱볼도 그냥 가져가자. 꿈 같은 음악을 틀어놓고 같이 춤추자. 아름다운 것을 버리지 말자. 끝까지 불행하고 아름답게 함께 살자. 이건 내가 지금까지 영화에서 받았던 그 어떤 메시지보다 독특하고 따뜻한 말이었다. 끔찍하고 잔혹한 일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을 무자비하게 괴롭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윤리적이고 위로가 된다는 평을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날 같은 현실 속에서 죽고 죽이며 살아가는 소현, 지수, 병욱을 영화는 제인이라는 (어쩌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인물을 통해 끌어안는다. 제인은 결국 죽었고, 애초에 모든 것이 소현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 위로는 결국 아무런 힘이 없는 가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날 우리가 함께 추었던 춤까지 없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나고 혼자 남겨진다고 해도, 뉴월드에서 제인이 불러준 노래가 의미 없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소현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


불행한 얼굴로 우리 다시 만나요

이 글을 중간 정도 쓰다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한참 동안 임시보관함에 버려뒀었다. 그동안 (놀랍게도) '개 같이 불행'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방학을 했고, 난 이 글의 첫머리에서 영화를 같이 보러 갔던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로 방금 결심한 참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이렇게 같이 놀 수 있을까. 영원 얘기까지는 꺼내지도 말고. 당장 1년 안에라도 우리 중 누군가가 군대를 가거나, 연애를 시작하거나, 아니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된다면. 나는 언젠가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궁금하지 않으시겠지만..."으로 시작하는 긴 편지를 써서 강의실 천장에 숨겨 두게 될까. 그래도, 결국 그렇게 다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자. 그래서 먼 훗날 다시 만나자. 어쩌다 한번 이렇게 행복하면 됐지, 중얼거리면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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