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A와 나는 성별도 나이도 학번도 학과도 동아리도 다 다르다. A와 나의 접점을 굳이 표현하자면 각각 '친구 동아리 선배'와 '동아리 후배 친구'가 될 것이다. 얼핏 '사돈의 팔촌'과 흡사하게 들리는 이 말은 당연히 A와 내가 왜 그렇게 붙어다니는지 설명해주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길고 귀찮은 설명이 수반되므로, 나는 남들에게 A를 그냥 친구라고만 말한다. 맞다. A는 내가 처음으로 사귄 '그냥 친구'다. 반 친구도 과 동기도 동아리 친구도 아닌 그냥 내 친구. A는 내게 무척 소중한 사람이지만 친한 친구 사이가 대개 그렇듯이 A에게 이 말을 하면 A는 분명 비웃을 것이므로 여기에 이야기해본다. 


A는 스물한 살이고 학교를 일찍 가서 3학년이고 법을 공부하고 자취생이고 그동안 연애를 두 번 해봤고 키는 좀 작고 머리는 파란색이고 무척 다정한 사람이다. 내가 마음 내킬 때만 A를 오빠라고 부르고 톡톡 쏘는 말로 상처를 주고  A의 공부를 방해하고 A의 침대에서 자고 A의 음식을 먹어도 A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A는 내가 밤중에 배고프다고 하면 초밥이나 김밥을 사다주고 새벽에 낯선 곳에 간 내가 무섭다고 하면 걱정해주고 내가 기숙사를 옮길 때는 짐을 옮겨 주고 내가 취하면 기숙사까지 꽤 먼 길을 데려다 주었다. 4월 15일에 처음 만난 이후로 A와 나는 아주 많은 것을 함께했고 그중에는 남들이 봤을 때 "쟤네 사귀네" 싶을 만한 것도 많았지만 어쨌든 A와 내가 서로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A가 처음 내 손을 잡은 날은 내 생일이었다. 아니 밤 열두 시가 지났으니 생일 다음 날이었겠다. 나는 취했고 우울했다. 새벽 세 시 아니면 네 시였던 것 같다. A와 나와 다른 친구 둘, 그렇게 넷이서 A의 자취방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나는 침대 위, A는 그 바로 밑. 친구와 나란히 눕느라 내 양손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왔고 A가 그걸 잡았다. 그때 내가 무슨 기분이었냐면, 어, 좀 덜 서러워지는 것 같았다. 두 손을 깍지 끼고 흔들면서 나는 내 불행한 가정사를 두서 없이 털어놓았다. 만난 지 한 달이 좀 넘었을 때였으니 최단 기록이었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몇 달에서 몇 년은 지나야 말할 용기가 나던 이야기를. A는 그래그래 하고 들어주었고 다음날부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날이 밝고 술이 깨고 나니 그제야 A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겨우 그런 것 가지고 의심하기에 A는 원래 손 잡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원래 모두에게 다정했다. 평소 A는 내게 자기 옛날 연애 이야기를 즐겨 했고 나는 A에게 A의 후배 중 누구라도 좀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곤 했으므로 아마 우리가 서로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A는 심심하면 내 손을 잡고 나도 거기 익숙해졌는데 그래도 왠지 가끔 짜르르할 때가 있다.


지금은 방학이고 애들은 전부 고향으로 돌아갔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학교에 남은 건 방학중 기숙사 입사를 신청한 나와 자취생인 A뿐이다. 토요일인 오늘 기숙사 식당은 밥을 주지 않았고, 나는 A의 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 내가 즉석밥을 사오고 A가 식재료를 사서, 같이 요리를 하고 바지락된장찌개, 어묵양파볶음, 문어비엔나구이를 차려 먹고, 나란히 드러누워서 손 잡고 무한도전을 보았다. 내가 잠이 와서 꾸벅거리자 A는 네 맥박이 점점 느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역시 기숙사 식당은 밥을 안 주니 또 A의 집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메뉴는 돼지고기김치찌개와 계란후라이, 그리고 내일까지 비가 오면 파전을 부쳐 먹기로 했다. 골똘히 메뉴를 정하면서 나는 결혼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A와 연애하는 것, 그러니까 A와 입을 맞추거나 같이 자는 건 전혀 상상할 수가 없는데 어쩐지 A와 결혼해서 같이 사는 건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A가 여자였어도 나는 결혼 생각을 했을 것인가, 안 했겠지, 그럼 난 A를 좋아하나.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A는 나를 좋아하나.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우리는 왜 방학 첫날 밤 아홉 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깜깜한 시골길을 손 잡고 걸어다녔나. 오늘 너무 많이 걸었다고 힘들어 죽겠다고 투덜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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