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기 힘든

'견디다'는 말의 의미를 피부로 깨달은 건 어릴 때 외갓집을 가던 길이었다. 네 시간이 넘는 거리. 나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었고 차 안에서 몸을 배배 꼬고 난리가 났다. 보다 못한 엄마가 좀 가만히 있으라고 야단을 쳤고 난 엄마는 안 심심해요? 물었다. 엄마는 당연히 심심하지, 근데 어떡해,라고 대답했다.

맞아. 어떡해. 도착하려면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심심하다고 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순간이동을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가만있는 거지. 이것이 내게 '견디다'의 첫 의미였다.

근데 살다 보니까 세상에는 좁은 차 안에 세 시간 있는 것보다 더 짜증 나는 일이 많더라. 그리고 그런 일에도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학교를 폭파시킬 수도 사람을 쏴 죽일 수도 집을 불태워버릴 수도 없었다. 할 수 있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견디는 것뿐이었다. 납작 엎드려 견디고 있으면 분노와 무력감과 온갖 어두운 생각이 몰려왔다. 나는 그것들도 견뎠다.

견디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냥 다 폭파시키고 쏴 죽이고 불태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내게 그럴 힘이 없다면, 그렇다면 잘 견디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를 죽이지 않고, 단단하게 견디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견딤 끝에는 좀 다른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참 차를 타고 가면 어느새 외갓집에 도착해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사촌들과 놀 수도 있었던 것처럼.



저녁 무렵

저녁이 오는 모습을 서서 지켜보던 날들이 있었다. 한 색깔이 다른 색깔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이내 모든 색이 사라지고 세상이 어둠에 잠기는 모습을 가만히 가만히 지켜보았다. 늦은 오후의 비스듬한 햇빛. 모든 윤곽선이 온화해지고 머리카락은 황금빛 왕관이 되는 시간.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초저녁의 희미하고 슬픈 색깔. 아주 연약하고 투명한 보라색. 차츰, 세상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나뭇잎 색깔이 검어지고, 하늘 색깔은 짙어지고. 분홍색, 보라색, 군청색, 회색. 어느새 불빛들이 별처럼 총총 켜지고, 깨끔한 달이 떠오르고, 그리고 까만 밤.

이 모습을 보면 어김없이 슬퍼지는데 그 이유는 아직 모른다. 다만 내가 무슨 세월의 무상함을 알 나이도 아니고 그냥 저녁이 아름다워서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봄날의 벚꽃 비, 여름의 비 맞은 초록, 오래된 동네, 선명한 그림자, 펄펄 내리는 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반드시 슬픔을 데리고 온다. (억울하게도 반대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슬픔이 아름답지는 않다.)

태양이 유독 찬란하게 스러지는 저녁이 있다. 그런 저녁에는 창밖으로 상체를 다 내밀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평생 슬퍼도 좋겠다고.


잘못

피해자와 가해자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면 난 몇 번이라도 피해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 한때 나는 누군가 날 칼로 쑤시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칼을 쥔 손은 내 것이었다. 나 혼자 칼춤을 추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고 있었던 거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의 기분이란.

'tower of my mistake'라는 곡을 들을 때마다 어딘가에 내가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 탑을 이루고 쌓여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추하고 비겁한 탑이 매일매일 높아진다. 내가 망쳐 버린 일들. 내가 울게 한 사람들. 나는 멀리멀리 도망쳐 모든 것을 모른척하려고 하지만, 탑은 너무 높아서 어딜 가도 그 꼭대기가 보인다. 날씨가 풀리고 꽃이 피어도 탑은 멀리서 차갑고 굳건하게 서 있다.


(여기 올라오는 조각조각 글들은 스마트폰 어플 '씀:일상적 글쓰기'에 올린 글을 옮긴 거예요. 하루에 두세 개 정도 글감을 주는데 내 글 쓰고 사람들 글 읽는 게 꽤 재밌습니다. 거기서 제 필명은 셔틀콕. 제일 좋아하는 영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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