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다


내 꿈은 기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나 때문에 여분의 무게를 지게 하고 싶지 않고, 내가 기대는 사람이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무섭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날 떠나면 내가 와르르 무너질까 겁이 난다. 아무한테도 기대지 않고, 내 두 발로 서서 혼자 휘청거리고 바람을 받아내고, 혹시 넘어진다 해도 내 무릎만 다칠 뿐 주위에는 아무런 파장도 일지 않는 그런 삶이 살고 싶다. 이런 내 포부를 듣고 친구는 바보 같다고 말했지만.

그래서 정말로 기대지 않고 살고 있냐면 그건 아니고, 오히려 구질구질할 정도로 사방팔방에 엄살 부리고 찡찡거리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기대지 않기로 다짐'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조금 외로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몇 번 했다. 이를테면 메로나 하나를 앞에 두고 울면서 메로나가 천천히 녹아 허물어지는 것을 구경할 때. 메로나 말고 사람 앞에서 우는 것, 누군가의 품에 안겨 우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질 때. 또는 몇 년 전부터 출판계에 범람하는 '토닥토닥' 류의 에세이를 경멸하며 '저건 가짜 위로야, 난 가짜 위로는 안 받아'라고 생각하다가 진짜 위로도 못 받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무엇보다, 위로를 받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기 창피해서 일부러 돌려 돌려 우울한 말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대체 누구 좋자고 이렇게 센 척을 하지? 아니 심지어 센 척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같은 생각과 함께 혐오감이 밀려온다. 결국 그냥 관심 받고 싶은 거 아냐. 그래서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왜 초연해지지 못하지.

이 글을 읽을 몇 명은 이미 내가 너무 많이 기대고 있어서 읽으면서 비웃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노력 중이다. 언젠가는 안 그래도 피곤한 사람들의 어깨에서 내 무게를 거둬 가겠다고. 내 짐은 혼자 싸안고 혼자 서겠다고. 그런데 언제 그럴 수 있을까.


모욕


눈물을 그치고 혼자 카페에 갔다. 책을 조금 읽다가, 덮었다. 너무 억울해. 나쁜 말을 들어서 억울한 게 아니라 그걸 듣고 울어버려서 억울해. 10년 정도 지나면, 20대가 되면 그 어떤 말에도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고 웃어넘기게 될 줄 알았는데. 눈 땡그랗게 뜨고 오냐 더 지껄여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상처를 받다니. 하나도 강해지지 않았잖아. 그 앞에서 (또다시) 눈물을 보였다는 게,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게 너무 모욕적이라 책에 집중이 안 됐다. 우는 모습은 이제 정말 그만 보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단 음료를 쪽쪽 빨면서 모욕을 삭히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바람 다 쐤으면 들어와라.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방금까지 소리 지르던 사람의 누그러진, 거의 다정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목소리를 듣자마자 확 눈물이 났고, 그 순간 전보다 백배는 더 큰 모욕감이 몰려왔다. 나는 강아지가 아니야. 씨발 나는 이딴 일에 안 울어. 다정한 말에, 어설픈 위로에 안 약해져.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눈물은 계속 났고 난 또다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길에서 우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정말로 그 어떤 모욕도 받지 않을 거라는, 차갑고 냉정한 멘탈 짱짱맨이 되어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는 얼뜨기 같은 다짐을 하면서 얌전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허무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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