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너무 길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는데, 아무래도 노는 데 질린 것 같다. 이제 돈도 똑 떨어졌고,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는 너무 늦었고, 그래서 온종일 집에서만 뒹굴거리고 있는데, 그게 너무 오래가다 보니 내게 있는 (원래 많이 모자란 편인) 에너지나 의욕 같은 것이 완전히 바닥나 버렸다. 어떤 콘텐츠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몰아서 보려고 종영 때까지 미뤄둔 드라마도,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예능도 통 보고 싶지가 않다. 책도 영화도 음악도 아무 재미가 없어서 남의 집 고양이 동영상이나 들여다보던 나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찾아간 도서관에서 그냥 표지가 예쁜 책을 한 권 집어 들었고,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어내렸다. 크게 웃지도 울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맛있게, 오래 앓다가 먹는 미음처럼. 손보미의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었다.


줄거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소개할 수도 있겠다. 영화처럼. '연구실에서 쫓겨난 유학생 '종수'는 짐을 정리하다가 고등학교 시절 알고 지내던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하고. 이를 계기로 유명 브랜드 랄프로렌의 창시자 '랄프 로렌'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조셉 프랭클, 레이철 잭슨, 섀넌 헤이스를 만나며 종수는 숨겨진 진실에 한발짝 다가서게 되는데...'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세계에 '숨겨진 진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끝없이 많은 이야기만이 존재할 뿐. 종수는 이 이야기의 우주에서 여행자가 되어 유영한다. 모두가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보았지만 정작 얼굴은 잘 모르는 남자 랄프 로렌을 시작으로, 매년 노벨상 발표 이후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미츠오 가쿠 박사, 천재 시계공이자 형편없는 권투선수 조셉 프랭클, 104세의 할머니 레이철 잭슨, 그리고 끝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이 되고 싶다'던 소녀 수영까지.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1차원), 새로운 화자를 만나며 넓어지고(2차원), 그러나 끝내 빈 공간을 채우지 못하고 계속해서 깊어진다(3차원). 종수가 만난 사람들은 다들 자기 이야기 하기에 바쁘고, 정작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랄프 로렌은 잘 등장하지도 않는다. 사실 읽다 보면 조금 지루해진다. 이 이야기들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따라가지. 종수는 이들과 아무 관계도 아닌 한국인 유학생이고 랄프 로렌과의 접점이라고는 고등학교 때 잠깐 알고 지내던 여자애 하나뿐인데 그애는 이미 오래전에 결혼했잖아. 하지만 종수는 목숨이라도 걸린 것처럼 전화번호부에 있는 모든 조셉 프랭클들에게 전화를 걸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테이프를 정리하고 반복해서 듣는다. 왜냐면 종수는 실직했으니까. 이제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종수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지아 류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없을 테니까. 노벨상 수상에 실패할 때마다 멋진 무용복을 입고 아이스링크장을 찾는 가쿠 박사처럼, '무엇이든 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종수는 애타게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이야기들이 오랜 질문의 답을 찾아주길 바라면서. "랄프 로렌은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끝내 답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답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목소리들이 남는다. 끊어졌다 이어지는 목소리. 문장과 문장 사이의 침묵과 정적. 별 재미도 없고 딱히 감동적이랄 것도 없는 허무한 여정이지만, 그 끝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슬픔과 위로를 얻는다. 이를테면 이런 순간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장묘에 참석하고 있던 어떤 뚱뚱한 남자의 모자가 저멀리로 날아갔다. 모자 주인은 모자를 따라 뒤뚱뒤뚱 뛰어갔다. 약간 버둥거리다가 마침내 모자를 주운 그는 숨이 차는지, 두 손을 양쪽 허벅지에 얹은 채로 상체를 숙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한참 후, 상체를 쭉 편 그는 아주 정성들여 모자를 썼다. 그리고 잭슨 여사의 묘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왜 그 재미있는 추리 드라마도 애니메이션도 못 보고 껐으면서 이런 심심한 소설은 끝까지 읽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노크 소리를 기다리는 일. 똑똑, 거기 있나요.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난 손보미라는, 이름과 얼굴(인터뷰에서 봤다) 말고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방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똑똑. 거기 있나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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