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A와 산책을 했다. 이상하고 조용한 초여름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전부 끝났고, 오직 A와 나만 남아서 텅 빈 학교를 헤매는 것 같았다. 손을 잡고 깜깜한 이차선 도로의 한가운데로 걸어다녔다.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비에 젖어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보았다. 서로 기대 앉아서 광주 지하철이나 더불어민주당이나 페미니즘이나 행정소송법 얘기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이상했으니까, 그게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매일 한 사람이랑만 만나고 싸우고 손 잡고 걷는 게.


기숙사 식당이 열지 않은 마지막 일주일은 A의 자취방에서 밥을 먹었다. 아니 같이 살다시피 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요리책을 보며 오늘은 뭘 먹을지 정하고, 같이 재료를 사고 요리를 해먹고, 배가 부르면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던 날들. 낮잠을 자다 깨면 공부하는 A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심심하다며 계속 A를 귀찮게 했지만 A는 문제를 풀거나 오답노트를 정리하면서도 나와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A는 자기가 지금 공부하는 법 이야기를 했고 나는 방금 낮잠 자면서 꾼 꿈 이야기를 했다. 서로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실없는 이야기들. A와 나는 관심사가 아예 달랐지만 잘 놀았다. A가 JTBC 다섯시 정치부 회의를 틀면 나는 복부장 성대모사를 하는 식이었다. A랑 같이 있으면 편하고, 재밌고, 즐겁고... 그러다 가끔 감정의 모서리 같은 게 튀어나왔다. 나는 그걸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치워 버렸다.


A의 집은 신기하게도 전기세가 별로 나오지 않았고, 그래서 하루종일 에어컨을 틀어놓을 수 있었고, 그래서 A는 하루종일 나를 끌어안고 있을 수 있었다. 정말로 그 일주일 내내 A는 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하루종일. A의 품에서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나는 A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나를 그냥 푹신한 베개쯤으로 생각하는지, 나는 A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냥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포근함을 좋아하는지, 두 질문 중 어느 것에도 대답하지 못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이상하고 안온한 날들이었다. A의 머리카락은 점점 물이 빠져서 파란색에서 초록색을 거쳐 노란색이 되었다. 낙엽이 지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4주가 지나고 난 집으로 돌아갔다. A는 자기 자취방에 남았고. 그 다음부터는 할 얘기가 별로 없다. A는 매일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전화를 기다렸다. 어제, 그동안 A와 내가 통화한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1903분. 31시간. 세상에 그 많은 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한 거지. 싸우기만 했잖아. 왜 싸웠지. 왜냐면 너가 법 얘기만 하니까.... 그렇게 또 싸우고.


이제 방학이 끝났다. 나는 오늘 학교로 돌아가고, A는 그동안 준비했던 시험을 본다. A와 나는 내일 만날 것이다. 반가울까. 당연히 반갑겠지. 자꾸 튀어나오는 감정의 모서리를 접어두고, 이상했던 초여름은 이상한 채로 놓아두고. 일단은, 너를 만나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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